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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모험 원한다면, 이 동아줄 냉큼 잡으세요

입력
2022.10.21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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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ㆍ최민지 지음ㆍ모래알 발행ㆍ64쪽ㆍ1만6,000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ㆍ최민지 지음ㆍ모래알 발행ㆍ64쪽ㆍ1만6,000원


“지금 어린이들한테 그림책이 뭐가 매력적일까 싶기도 해. 조카가 좋아하는 게임을 나도 같이 해보면, 와, 자잘한 재미에 교훈까지 이렇게나 풍부한데 내 그림책이 상대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존경하는 그림책 작가님과 최근 나눈 대화다. 그렇다. 책은 올드 미디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책은 늘 위기에 몰리곤 했다. 요즘 어린이들이 동영상에 너무 빠져 있어서, 알고리즘에 이끌려 다녀서 걱정이라고들 하지만,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래 동영상은 늘 책을 이겨먹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걱정하는 분들도 만화영화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추억이 다들 있을 테고, 책보다 스마트폰 보는 시간이 훨씬 많을 거다.

보기와 듣기는 딱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지만 읽기는 훈련이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니 책읽기란 어느 정도는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이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그림책 읽는 법을 새로 배워야만 했는데, 글자야 누구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많이 읽을 수 있었지만, 그림 읽기란 또 다른 훈련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그림책을 읽어내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도전이지만, 작가가 여러 겹으로 설계해놓은 세계를 꼼꼼히 탐험하고 내가 느낀 것을 ‘모든’ 세대의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인 것 같다.

아이가 책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고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책이 주는 상상력과 자유를 표현한 장면. 키다리 제공

아이가 책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고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책이 주는 상상력과 자유를 표현한 장면. 키다리 제공

최민지 작가의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줄이야'는 보편적인 책읽기에 관한 내용이면서, 그림책을 읽는 특별한 경험이란 무엇인지도 실감하게 해준다. 나는 읽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 책이 ‘글 없는 그림책’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 책에는 글자 요소가 많고 온몸이 글자로 이루어진 ‘책사람’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글이 이야기 전개를 담당하지 않기 때문에 글자를 모르더라도 이 책을 즐기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이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된다면, 글자 요소들을 그 나라 언어로 옮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한글 자체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까. 벌써부터 질문이 많아진다.

색깔도 굵기도 다른 줄들이 그려져 있는 면지를 넘기고 본문을 펼치면, 한 아이가 하얀 화면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책장을 넘기면 저 위에서 붉은색 줄이 내려오고 있다. 아까 면지에서 봤던 줄 가운데 하나다. 마치 할 말이 있다는 듯 아이에게 다가오는 붉은 동아줄. 악수하듯 손을 내밀자 줄은 휘리릭 아이를 데리고 한없이 올라간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아이의 표정은 극적으로 바뀐다. 호기심, 놀라움, 두려움, 반가움… 동아줄을 잡고 끝까지 올라간 아이는 줄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환하게 웃는다. 하늘을 날고 있는 수많은 책들이 'ㅋ', 'ㅎ', '웃' 같은 글자들을 떨어뜨리며 시끌벅적 환영해준다.

아이는 '책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책이란 작가와의 대화이자 낯선 세계 속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행위다. 키다리 제공

아이는 '책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책이란 작가와의 대화이자 낯선 세계 속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행위다. 키다리 제공

자신에게 동아줄을 내려준 책을 펼치자 아이 앞에는 ‘책사람’이 나타나고 둘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책에 인쇄된 글자를 우리는 ‘활자’라고 부른다. 원래는 사각기둥 모양의 금속판에 새긴 글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책사람의 몸에 시시각각 다르게 새겨지는 글자들은 책읽기를 통해 활자가 정말로 ‘움직이는’ 존재로서 생명력을 가진다는 은유가 된다. 또한 책사람은 책읽기가 혼자 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온전히 혼자 하는 행위만은 아니라는 점도 잘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책읽기란 작가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화하는 것이기도 하고,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니까. 아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붉은 동아줄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더 많은 존재들에 가 닿는다. 책읽기란 이렇게 다른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최민지 작가의 책은 특히 저학년 어린이들이 정말 좋아한다. 뭐가 좋으냐고 물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냥 재미있다'고 대답한다. 작가에게는 이 말이 최고의 칭찬이겠지만, 나는 어른이니까 좀 다르게 이야기해야겠지? 최민지 작가는 독자들을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로 데리고 가서 한바탕 휘저어 놓는다. 유쾌한 모험을 하고 현실로 돌아온 독자들은 평범한 사물들에 자신만의 특별한 상상을 더하고 싶어진다. 책장을 열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니, 최민지 작가가 던지는 동아줄을 냉큼 잡을 일이다.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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