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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고위공직자에게는 '훼손될 명예'도 없다

입력
2022.10.19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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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규
오용규변호사

편집자주

판결은 재판받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지만, 대법원 판결은 모든 법원이 따르는 규범이 된다. 규범화한 판결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판결과 우리 삶의 관계를 얘기해 본다.


'기레기' 무죄여도 '도라이'는 유죄
명예훼손 기준 상황마다 달라져도
권력 견제 위해 공인 비판 허용돼야

최근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 모욕 고소·고발 건수가 급증하고 있으나 기소 처리 건수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약 1만1,000건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모욕 고소·고발도 적지 않다.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발된 사건이 얼마 전 대법원에서 각각 무죄 판단을 받기도 하였다.

최근의 대법원 판결을 보니 '어용', '앞잡이'라고 하면서 현수막을 걸어 놓은 것은 유죄, 인터넷 포털 사이트 기사 댓글로 '기레기'라고 게시한 것은 무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도라이'라고 쓴 것은 유죄라고 하고 있다. 대법원은 다소 모욕적 표현이 있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타당성 있는 사정에 기초하여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일부 모욕적인 표현이 사용된 것에 불과하면,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아 무죄라고 판시한다. 대법원이 제시하는 유죄와 무죄의 기준은 '사회상규'인데, 이 법률용어는 법조인도 그 뜻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데 일반인에게는 애매하기 그지없다. 거기다가 법원은 전파가능성도 모욕죄 성립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결국 법원의 판단을 받기 전에는 유죄, 무죄를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고소가 많은 모욕죄를 독일, 일본, 대만 등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형사범죄로 처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의외일 것이다.

모욕죄보다 더 논란이 있는 게 명예훼손이다. 명예훼손은 영국에서 국가 및 집권자에 대한 형사범죄로 처음 다뤄지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엘리트들의 명예를 보호하는 데 위력을 발휘하다가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개인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으로 진화하게 되었으나 최근 형사 명예훼손죄가 폐지되어 버렸다. 피해보상은 민사적 구제로 충분하며 언론 자유를 보호하고 세계적 흐름에 맞는다는 이유에서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그전부터 언론의 자유를 강조한 수정헌법 1조에 근거하여 명예훼손을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독일을 비롯한 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는 여전히 명예훼손을 형사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욕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죄 폐지에 대하여 활발히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모욕죄, 명예훼손죄의 고소·고발에 익숙해진 우리 국민들이 위 죄들의 폐지에 공감할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인터넷, SNS의 홍수 속에서 사생활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공개되어 퍼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명예훼손죄의 전면 폐지가 정당화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언론의 명예훼손 행위에 대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기도 어렵고 그 피해 회복이 충분히 이루어지기도 어렵다. 몇 년 전 법원에서 허위사실인지, 악의적 목적이 있는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에 의한 것인지 여부 등을 기준으로 명예훼손의 위자료 기준을 1억 원 이상으로까지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미국과 같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에 대한 충분한 제지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는 재고되어야 한다. 대법원이 공공 이익에 관한 사실인 경우 명예훼손죄 적용을 엄격하게 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공인에 대한 비판에 형사처벌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 그들에 대한 비판이 위축되고 권력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진다. 최근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명예훼손죄 고소로 대처하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사법기관이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를 의율함에 있어서는 더욱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죄 규정을 폐지하거나 적용 범위를 축소하는 법 개정을 고려하여야 한다.

오용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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