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실, 첩보·부정확한 사실 근거로
관계장관회의서 자진 월북으로 가닥
국방부·국정원, 관련 첩보 무단 삭제
서훈, 박지원 등 20명 검찰수사 요청
서욱 등 삭제 혐의 부인 "배포선 조정"
감사원이 13일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 정부가 관련 정보를 은폐하고 고(故) 이대준씨의 자진 월북을 근거 없이 단정했다며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 5개 기관 20명에 대해 검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적용된 혐의는 직무유기,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등이다. 지난 6월 17일 감사계획을 발표하고 9개 기관에 대한 감사(7월 19일)에 착수한 지 57일 만이다.
감사원은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월북을 단정할 수 없는 '월북 의사 표명' 첩보와 부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자진 월북으로 속단했으며, 이후 국방부와 국정원이 관련 자료를 무단삭제하는 등 사실을 은폐한 혐의가 있다고 결론 지었다. 하지만 야당과 수사 의뢰된 당사자들은 월북 판단은 한정된 특수첩보(SI)를 바탕으로 내린 잠정 결론에 불과하며, 자료를 삭제한 것도 한미연합 정보자산의 무분별한 전파를 막기 위한 행위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확한 진상과 은폐 혐의 유무는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을 통해 가려질 전망이다.
靑 관계장관회의 이후 조직적 은폐
감사원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이씨가 실종되고 38시간이 지난 2020년 9월 23일 오전 1시 서훈 당시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관계장관회의에서 자진 월북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건 초기만 해도 국방부와 국정원은 월북 가능성을 낮게 봤지만 “이씨가 북측에 월북 의사를 표명했다”는 군 당국의 첩보가 전날 저녁 7시 40분쯤 들어오면서 월북으로 판단이 기울었다. 그러나 이씨가 북한의 거듭된 질문에 월북 의사를 마지못해 표명했을 가능성을 배제했으며 이후에 월북 의도가 낮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이를 제대로 분석,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원의 판단이다.
조직적 은폐 정황도 있었다. 감사원에 따르면 서욱 전 장관은 관계장관회의 직후, 퇴근한 담당자를 새벽에 불러내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ㆍ밈스)에 탑재된 첩보 관련 보고서 60건을 삭제하도록 했다. 국정원 역시 비슷한 시간 박지원 전 원장 지시로 SI를 바탕으로 작성한 첩보보고서 등 총 46건의 자료를 무단삭제했다. 국방부는 더구나 같은 날 오후 1시 30분, 출입기자단에 이씨 피살 사실은 제외하고 실종됐다는 내용만 담은 공지를 배포했다.
이와 함께 감사원은 국가안보실이 9월 23일 문 대통령에게 보고될 상황보고서에 이씨 피살 내용을 제외했다고 밝혔지만, 당일 오전 8시 30분 대면보고 과정에선 해당 내용이 담겨 '끼워맞추기 감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문 대통령이 대면보고 자리에서 "정확한 사실 확인이 우선이다. 북측에도 확인을 하도록 하라. 국민들께 사실 그대로 알려야 된다"고 발언한 만큼 국가안보실이 관련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된다. 서 전 장관도 밈스 삭제 이유와 관련해 “민감한 정보의 불확실한 전파를 막기 위해 유통망에서 게시물을 내렸을 뿐, 정보 원본 자체는 삭제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보실 지침에 ‘자진 월북’ 무리수
감사원은 국가안보실의 ‘자진 월북’ 지침에 각 기관들이 첩보와 부정확한 사실만으로 무리하게 단정지은 정황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국방부는 안보실의 추가 분석 지시에도 이씨가 입었던 구명조끼에 한자가 쓰여있는 걸 알았지만 남한 조끼로 단정지었고, 해경 역시 이씨가 탄 무궁화 10호나 민간 어선에 한자가 적힌 구명조끼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소유자가 확인되지 않은 슬리퍼도 아무런 근거 없이 이씨 것으로 봤다. 오히려 이씨의 채무관계나 도박 중독 등을 짜깁기해 자진 월북으로 몰아갔다는 것이 감사원의 판단이다.
이씨 시신 소각 여부와 관련해서도 국방부는 내부적으로는 시신이 소각됐다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외부로는 시신 소각 여부가 불확실하다거나 추가 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답변하는 등 관련 입장을 바꿨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위기관리 규정도 안 지켜
이번 감사에선 초동 대처 과정에서 위기관리 규정을 따르지 않고 부처 간 떠넘기기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국가안보실은 실종된 이씨가 북한 해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을 군 당국으로부터 보고받고도 대북 통지 주관 부처인 통일부에 전파하지 않아 송환에 필요한 조치를 제때 하지 못했고 최초 상황평가회의도 실시하지 않았다. 군 당국은 국민이 억류된 경우 취해야 할 군사작전 검토는 하지 않고 “통일부가 주관해야 할 상황이므로 군에서 대응할 것이 없다”며 회의를 종료했다. 뒤늦게 상황을 전달받은 통일부 역시 적절한 조치 대신 국정원으로부터 “추가 상황 파악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은 후 상황을 종료했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 결과에 대해 이른 시일 안에 감사위원회 의결 등을 거쳐 공무원에 대한 엄중 문책 등의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일부 감사위원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의결 과정이 순탄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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