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부국제서 이어진 강수연 추모… 단편 감독에 택시비 쥐여주던 마음 씀씀이

입력
2022.10.14 07:10
12면
0 0

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강수연의 영화 속 여러 모습들.

강수연의 영화 속 여러 모습들.

고인의 과거 영상들이 대형 스크린을 채웠다.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건반을 두드리며 떠난 자의 삶을 추억했다. 숙연함이 축제 현장을 감돌았다. 배우 강수연(1966~2022) 추모는 지난 5일 오후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의 주요 장면 중 하나였다.

부산영화제뿐만 아니다. 8월 25일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 하이라이트 역시 강수연이 차지했다. 원로배우 김지미가 강수연을 대신해 무대에 오른 유족에게 공로패를 수여하는 모습은 고인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강수연이 세상을 떠난 5월 7일 이후 국내 영화계 여러 행사에선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강수연은 어려서부터 스타였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한 영화인은 강수연을 대형 승용차로 기억한다. 강수연을 촬영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고급 차량이 교문을 수시로 드나드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3세 때 거리에서 캐스팅 된 후 아역스타로 활약했으나 많은 이들처럼 그 시절을 뚜렷이 기억하지는 못 한다. 강수연이 성인 배우가 된 이후 연기가 뇌리에 남아 있다. 영화 ‘고래사냥 2’(1985)에서 소매치기 영희를 연기했던 강수연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강수연은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매사 당당한 여성 호정을 연기하며 눈길을 끌었다.

강수연은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매사 당당한 여성 호정을 연기하며 눈길을 끌었다.

강수연을 호명할 때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자배우상과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자배우상을 각각 안긴 ‘씨받이’(1986)와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가 소환된다. 두 영화는 물론 마음에 남을 작품이나 내게는 ‘그대 안의 블루’(1992)와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속 연기가 더 강렬했다. 자아실현을 위해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유림(‘그대 안의 블루’), 자유분방하게 남자와 만나는 호정(‘처녀들의 저녁식사’)은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인물이었다. 20세기 말 좀 일찍 당도한 21세기 여성들이라고 할까. 특히 간통죄 피소 후 “언제부터 형사랑 검사가 내 아랫도리를 관리해 온 거니”라고 일갈하던 호정은 당시 화제가 되기 충분했다. 유림과 호정은 저돌적이고 진취적인 강수연의 이미지가 없었다면 스크린에 구현되기 어려웠을 인물들이다.

강수연은 영화 '경마장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잠자리를 요구하는 옛 유학 동료와 불화하는 여성 J를 연기했다.

강수연은 영화 '경마장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잠자리를 요구하는 옛 유학 동료와 불화하는 여성 J를 연기했다.

강수연은 스크린 밖에서 숱한 이야기 거리를 남겼다. 지기 싫어하고 뭐든 이끌어 가고 싶어 하는 두목 기질이 곧잘 발휘되며 여러 사연을 빚어냈다. 미국 유학 시절 강수연과 인연을 맺었던 우광훈(‘직지코드’ ‘직지루트: 테라인코그니타’ 등 연출) 감독의 기억.

“미국에서 작은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초청을 했는데 자비로 오셨다. 귀국한 후에 종종 밥을 사시며 혼내기도 하시고 용기도 주시면서 장편영화 데뷔를 독려하시곤 했다. 어려운 경제적 사정을 알면서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동석한 사람이 볼까 봐 식탁 밑으로 택시비를 쥐여주시곤 했다.”

강수연은 월드 스타로 한국 영화를 빛냈으나 어찌 보면 불우했다. 그가 전성기로 보냈던 시절 한국 영화계는 침체의 터널 속에 있었다. 전국 곳곳에 멀티플렉스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고, 1,000만 영화라는 수식이 존재하지 않던 때다. 충무로의 간판이었다고 하나 사회 전체가 떠들썩할 만한 영화에 출연할 수는 없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가 부흥기를 열 무렵 강수연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에게도 한국 영화계에도 불행이었다.

단편영화 '주리'(2013) 이후 강수연은 연기를 중단했다가 2021년 '정이'에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단편영화 '주리'(2013) 이후 강수연은 연기를 중단했다가 2021년 '정이'에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강수연의 출연 영화 45편(한국영상자료원 집계) 대부분은 시간 저 멀리에서 깜박인다. 그는 넷플릭스 영화 ‘정이’ 촬영을 지난해 마치고 먼 길을 떠났다. ‘정이’는 22세기를 배경으로 정이(김현주)라는 전설적인 용병의 뇌세포복제 로봇을 완성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강수연은 뇌세포복제 연구소의 팀장 서현을 연기했다. ‘정이’는 내년 상반기 공개 예정이다. 강수연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위안이 될 만한, 그의 가치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는 전설의 면모를 인지할 만한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