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맞아 안성탕면체 개발…한정판 제품도 선봬
농심 마케팅 팀장 "정체성 살리되 신선함 끌어올려"
1983년 출시 이후 한자 표기를 고수해 온 장수 라면 '안성탕면'(安城湯麵)이 모처럼 한글 옷을 입었다. 농심이 한글날을 앞두고 지난달 한글 서체인 '안성탕면체'를 개발하고 한정판 제품을 출시하면서다. 특히 회사 측은 이번 서체를 무료 공개해 누구나 쓸 수 있게 하기로 했다.
40여 년 쓴 한자를 벗어던진 이유는 재미를 찾는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반 출생)와 접점을 늘리기 위해서다. 5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농심 본사에서 만난 최영갑 마케팅 팀장은 "인사동에 가면 국내 기업, 외국 기업 가리지 않고 모두 한글 간판을 달았다"며 "대단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색적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강하게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글 서체의 영향력이 있는 만큼 안성탕면체도 오래됐다는 이미지를 털고 소비자에게 보다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만들게 됐다"고 덧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성탕면이 오랜 기간 한자를 고수해 온 이유도 브랜드 이미지 때문이었다. 안성탕면은 '탕'(湯)이라는 한국의 국물 문화를 접목한 제품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한자로 표기하는 게 소비자가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봤다고 한다. 학교에서 한자 교육이 이뤄졌던 1980년대에는 한자 표기가 익숙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자 사용이 줄어 오늘날에는 한자를 쓴 유일한 제품으로 남게 됐다. 그럼에도 한자 표기를 이어온 것은 "오랜 기간 고유의 디자인으로 각인된 만큼 브랜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한글인데 붓글씨로 표현…"제품 정체성 유지"
관행을 깨고 올해 한글 서체를 선보이게 된 것은 지난해 가수 장기하가 선보인 손글씨의 인기에서 비롯했다. 지난해 한글날을 기념해 장기하의 손글씨가 담긴 한정판 제품을 냈는데 반응이 좋아 올해는 아예 서체를 따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특히 '신(辛) 라면'은 한글이 더 많이 쓰였기 때문에 모두 한자로 돼 있는 안성탕면이 한글 서체를 도입했을 때 좀 더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대신 안성탕면체는 제품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썼다. 붓글씨 디자인에 봉지에 담긴 사각형 라면처럼, 꽉 찬 네모꼴 형태로 만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면서도 가로 획은 가볍게, 세로 획은 무겁게 표현하고, 한 획에서 다양한 굵기를 연출해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최 팀장은 "기존 한자의 느낌에 시원하게 뻗은 획으로 생동감까지 살려 젊고 감각적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안성탕면체는 농심이 소비자를 대상으로 처음 공개하는 서체라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2015년 농심은 직원용으로 서체를 만들었는데, 내부 보고서에 통일성을 살리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엔 농심뿐만 아니라 여러 유통 업체가 다양한 한글 서체를 선보이고 있다. ①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2012년부터 해마다 한글 서체를 공개했고, ②롯데제과는 7월 설레임 20주년을 맞아 '시원한설레임체'를 선보였다. 당장 매출을 올리기는 어렵더라도 소비자에게 브랜드 정체성을 알리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서체 개발보다 중요한 건 사용 확대…지속해서 알릴 것"
이렇게 만든 서체를 더 많은 사람들이 널리 쓸 수 있게 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는 게 농심의 지론이다. 서체를 무료로 나눠 주고, 안성탕면체를 활용해 나만의 라면 문구를 만들어보는 '안성맞춤 백일장'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한정판 제품에는 '두 봉지라도 혼자 먹으면 그게 1인분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밥말은 라면 먹고 싶다' '겉모습은 꼬여 있지만, 내 속을 풀어주는 라면' 등 재치 있는 한글 문장이 적힌 카드를 함께 넣었다. 이들 문장은 회사 내부 공모전에서 뽑혔다.
최 팀장은 요즘 안성탕면체에 어떤 메시지를 녹여서 소비자와 소통할 것인지 고민 중이다. 농심은 안성탕면체를 활용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공모전도 진행 중인데, 올해 말 입상작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서체를 적극 알릴 계획이다.
아예 한글 서체를 모든 안성탕면에 적용할 가능성도 열어놨다. 최 팀장은 "아직까지는 한글날 전후로 400만 팩 한정 판매 중"이라며 "고객 반응을 살핀 후 한글을 쓴 제품을 계속 생산할지 고민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40년 동안 유지해 온 제품의 정체성은 지켜야 하니까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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