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대덕대 명예교수 인터뷰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민주적
권력서열 민감한 한국어 존대법, 선진국 진입 막아
'하대 기술'의 집약체 반말...살인도 불러"
#1997년 8월 5일 대한항공 801편이 괌 공항 주변 야산에 추락했다. 254명 중 228명이 사망했고 당시 1만8,000원이었던 대한항공 주가는 3,400원까지 급락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출세작 '아웃라이어'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사고 원인으로 '한국의 문화 관습'을 꼽았다. "대부분 비행기 사고는 기장과 부기장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데, 한국어는 언어구조 전체가 윗사람을 어떻게 대접해주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얽혀 있다. 항공기 사고와 한국의 서열 문화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한 그 책에서, 글래드웰은 월등한 성공을 가능케 한 사회·문화적 요인을 살피며 '비행기 추락의 민족 이론'을 제시했다. 이론을 내놓은 지 5년 후인 2013년 7월, 이번에는 아시아나 항공기가 샌프란시스코 비행장에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해외 주요 언론들은 다시 글래드웰의 이론에 주목했다.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 한국어, 정확하게는 한국어의 존대법과 하대법으로 인한 문제는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새 정부 들어 열린 첫 국정감사에서는 어김없이 반말 논란이 나왔고, 지난달에는 나이 어린 지인에게 반말을 듣고 모멸감을 느껴 흉기를 휘두른 50대 남성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지난 2019년 모텔 장기 투숙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무기징역을 받은 장대호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반말'이었다.
존대법이 발달한 예의바른 한국어? 하대법도 똑같이 발달
영어학자의 눈으로 한국어의 특징을 꾸준히 연구한 김미경 대덕대 명예교수는 한국어 존대‧하대법의 문제가 몇 개의 에피소드로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누구나 배우기 쉽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인 문자이지만, 상대방을 높이거나 낮추는 말이 문법까지 발달한 한국어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이다. 한국어의 존대법이 한국인이 위계질서와 권력서열에 민감하게 만들고 열린 의사소통, 나아가 민주화와 선진국 진입까지 더디게 한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지난 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언어 측면에서 살폈을 때 첫째 비결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가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직후, 모어인 한국어를 국가 공식어로 채택해 공식어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춘 점이었다. 두 연구를 끝낸 후 한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를 다시 언어 측면에서 연구했는데, 한국어의 존대‧하대법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연구를 모아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2020년1월·소명출판)을 출간한 바 있다.
흔히들 한국어는 존대법이 '발달한' 언어라고 인식하지만, 김 교수는 존대법이 '복잡한' 언어라고 지적한다. 상대를 높일 수 있는 화법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다.
호주 사이요르 부족이 동서남북 방향을 알아야 동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한국어는 상대방과 나, 그 대화를 듣는 청자 사이의 권력서열을 알아야 주어와 조사(김 장관이, 김 장관께서, 김 장관님께서), 동사(말해라, 말하세요, 말씀하세요, 말씀하십시오)를 선택할 수 있다. 한국인이 "실례지만"을 추임새로 붙이면서도 초면에 나이와 학번을 묻고 서열을 정리하는 이유다.
여야 신경전에도 "후배"로 서열 정리하는 '하대법의 마법'
상대방을 높이려면 나를 낮춰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는 존대법만큼 하대법도 복잡하다. 반말이 종종 언어폭력의 전술로 쓰이는 배경이다. '어린 사람의 반말에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둘렀다는 사건은 요즘도 일 년에 몇 번씩 보도된다.
김 교수는 이 '하대법의 기술'이 가장 절묘하게 쓰이는 분야로 정치를 꼽았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경남중‧고등학교 동창회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나란히 동창회에 참석한 그는 한 해 선배란 이유로 먼저 축사한 후 문 대표를 이렇게 불렀다. "후배, 앞으로 나와." 여야 대치 상황에서 김 대표는 문 대표가 단상에 오르자 손잡고 만세를 부르고 포옹도 했다.
김 교수는 "상대방을 후배라고 부른 후, 반말하며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게 놀라웠다. 반말 한마디로 두 사람 관계가 여야 대표가 아니라, 윗사람·아랫사람으로 변질된 순간"이라며 "한국어의 하대법을 이보다 잘 활용한 예를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절묘한 한 수"라고 꼽았다.
문제는 이런 '하대법의 기술'을, 듣는 사람은 언어폭력으로 받아들이고 업무 역량을 급속히 떨어뜨린다는 사실이다. 1990~2000년대 국내 항공기 사고가 존댓말로 인한 '잠재적인' 의사소통 불편의 결과라면, 언어폭력을 당한 후 생명이 위협당할 수도 있을 만큼 업무 역량이 떨어진다는 보다 직접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2015년 이스라엘 텔아브비대 의대 리스킨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언어폭력을 겪은 의료진은 그렇지 않은 의료진보다 52% 더 많은 오진을 했고 치료 과정에서 43% 더 많은 실수를 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 소속 의사 24명, 간호사 48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신생아가 괴사성장염에 걸린 상황을 가정해 실험한 결과다. 실험군이 들은 언어폭력은 "이스라엘 의료진 수준이 미국보다 형편없다"는, 한국 상사들은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수준의 비판이었다. 그럼에도 "실제였다면 신생아 생명을 위독하게 만드는 심각한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김 교수는 "해당 논문에서 연구진도 의료사고 상당 부분이 무례한 말로 인해 시작된다고 경고한다"고 지적했다.
각종 호칭에 에너지 낭비...존대법 폐해 고쳐야
한국어의 존대법, 그로 인한 한국인의 권력서열 집착에 대한 부작용은 각종 호칭 논란에서도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4‧7재보궐 선거 기간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위터에 쓴 김영춘 부산시장 후보 지지 선언에 대한 친문 지지자들의 공격이다. 김 교수는 "'김영삼이 발탁하고, 노무현을 지켜냈고, 문재인이 가져다 쓴 김영춘이야말로 부산의 적장자'란 말에 '대통령이 네 친구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아직 대통령이 국민 위에 있다는 정서"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해외 국가 원수는 바이든도 기시다도 시진핑도 모두 호칭 없이 이름만 쓰지만 한국 사람에게만 유독 호칭을 붙여 쓰는 것도 한국어 존대법의 특징이다. 탄핵 후 일부 언론이 '박근혜씨'로 보도한 것처럼 권력이 사라지면 호칭을 바로 격하시키는 것도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대통령 배우자 호칭 논란 역시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쏟는, 한국어 존대법의 대표적 부작용이다.
'시대 흐름과 더 이상 맞지 않는 한국어 존대법'을 바꿀 방안이 있을까.
김 교수는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대통령과 국민, 상관과 부하가 적어도 '언어적으로 평등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국어 존대법의 병폐를 개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화자와 청자 둘 다 존대법을 쓰든 하대법을 쓰든 하나의 문체로 통일하면 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말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상호 존대가 좋을 것"이라며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똑같은 위치'가 되는 걸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 4월, 70년의 전통을 깨고 대전고법 이인석 판사가 존댓말 판결문을 작성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많은 시민들이 판결문을 환영했지만, 법조계에서는 '법원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 교수는 "한자를 쓴 조선시대 양반들이 중국어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존댓말을 고수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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