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낮은 남성과 결혼하자 가족들 살해 협박
한국으로 피신... "돌아가면 죽는다" 난민 신청
법무부와 1심은 기각 결정 "사회적 박해 아냐"
항소심·대법원 "명예범죄 위험 커, 난민 인정"
법조계 "난민 인정 소송 관련 새로운 법리 제시"
신분이 낮은 남성과 결혼해 가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살해 위험이 있는데도, 정부가 난민 신청을 기각한 건 적법하지 않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법조계에선 "난민법상 '박해'의 정의와 난민 신청자의 피신 관련 입증 책임에 대한 새로운 법리를 제시해 난민 소송의 패러다임을 바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A씨 가족이 법무부 산하 인천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난민불인정 결정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2016년 3월 파키스탄에서 B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A씨의 신분(카스트)이 낮아 결혼하면 집안의 명예가 더럽혀진다"는 B씨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도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B씨 어머니가 두 사람의 혼인신고 사실을 알게 되자, B씨 가족들의 위협이 시작됐다. B씨의 어머니와 외삼촌은 가출한 B씨를 집에 돌아오도록 한 뒤, 감금·폭행하고 이혼을 강요했다. B씨 가족에게 뇌물을 받은 경찰관이 "A씨를 죽이겠다"며 B씨를 협박하기도 했다.
B씨의 외삼촌이 은신 중인 두 사람을 찾아내 살해 협박까지 하자, 이들은 한국으로 왔다. A씨가 국내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생과 배우자 체류 자격으로 입국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아기까지 낳았다.
A씨 가족은 2019년 3월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명예살인 등 명예범죄를 당할 수 있다"며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명예살인은 여성이 '낮은 신분의 남성과 결혼하는 등으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가족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뜻한다.
법무부는 난민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 가족은 불복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 법원은 기각했다. "A씨 부부가 겪는 위협은 B씨 가족의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일 뿐 사회적 박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항소심은 A씨 가족의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파키스탄에서 연애결혼한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이 매년 다수 발생하므로 A씨 가족도 명예범죄를 당할 위험이 크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는 "신변 위협은 B씨 가족의 감정 때문"이란 판단도 깼다. 재판부는 "B씨 가족의 위협은 파키스탄 관습에 따른 것"이라며 "물리적 폭력을 통한 강제이혼은 전형적인 박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법무부가 A씨 가족이 파키스탄으로 돌아간다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입증하지 못했다"고도 지적했다. 오히려 B씨 가족이 A씨 부부를 찾아내 위협한 점을 들어 "일가족이 파키스탄에서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장소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 자녀에 대한 난민 지위도 인도적으로 인정했다. 대법원도 항소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A씨 가족의 법률대리를 맡은 김종철 변호사는 "결혼을 둘러싼 가부장적 사회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을 당할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한 첫 사례"라며 "이번 판결은 박해에 관한 정의를 폭넓게 해석하고, 난민 신청자가 본국에 돌아가 피신할 장소에 관한 입증 책임을 법무부에 부과하는 등 난민 소송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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