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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국화가 피었습니다, 가을이 왔네요

입력
2022.10.10 04:30
수정
2022.10.10 19:32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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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취나물로 즐겨 먹는 참취의 꽃.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흰색 꽃 여러 송이가 모여 있다. 허태임 작가 제공

취나물로 즐겨 먹는 참취의 꽃.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흰색 꽃 여러 송이가 모여 있다. 허태임 작가 제공

가을이 왔고 들국화가 피었다.

‘들국화’는 어떤 특정한 식물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이 무렵 피는 국화과 식물 중에 구절초는 하얗게, 쑥부쟁이는 연보라색으로, 개미취는 좀 더 짙은 보라색으로 곳곳에서 ‘들국화 크루’를 이룬다. 조금 더 추워지면 산국과 감국이 노랗게 피어 그 무리에 동참할 것이다. 마당이나 베란다의 화분에 담아 기르는 국화들은 대개 구절초와 감국을 인위적으로 교배해서 만든 품종이다.

나는 강원도 영월과 경북 봉화의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산다. 태백산과 소백산을 잇는 능선 아래 놓인 산골 마을이다. 동네 뒷산 대부분이 해발 1,000m가 훌쩍 넘는다. 가을을 한발 앞서 맞이하고 싶을 때는 높고 깊은 산골짜기를 자주 찾아가 기웃거린다. 그러면 거기에 사는 국화과 식물들이 내게 말을 건다. 지금 한창 예쁘게 핀 자신들의 꽃을 눈여겨봐 달라고 꽃대를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방식으로. 나는 이제부터 이 친구들을 가을에 피는 ‘산국화’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산에 들어 가장 자주 만나게 되는 산국화는 참취다. “여러분께서 즐겨 드시는 취나물의 꽃이 이겁니다” 하고 내가 현장 강의에서 참취를 가리키며 설명하면, 그걸 처음 본 수강생들은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그 취나물이라고요?” 되묻는다. 단아하게 핀 꽃이 하도 고와서 밥상에 오르는 그 나물과 똑같은 것으로 보기가 어려웠나 보다. 어른 엄지손톱만 한 크기에 흰색 꽃 여러 송이가 오종종하게 모여서 마치 자그마한 꽃다발처럼 피는 게 참취꽃이다. 나물로 워낙 인기가 많고 약효가 좋다는 연구 결과가 차츰 밝혀지면서 전국적으로 참취 재배 농가가 늘고 있다. 내가 아는 참취의 ‘찐매력’은 천연염색에 쓰는 염료식물이라는 것. 옅은 카키색을 차분하게 내다가 염색을 거듭하면 돌연 밝고 짙은 색이 나와 직물을 경쾌한 분위기로 바꾸는 게 참취다. 염색하는 동안 풍기는 특유의 나물향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힘이 있다. 자연 속 참취는 깊은 산 활엽수림 아래에 주로 산다.

설치류 고슴도치를 닮은 수리취의 꽃. 정원에 심으면 가을 꽃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개성 강한 모습. 허태임 작가 제공

설치류 고슴도치를 닮은 수리취의 꽃. 정원에 심으면 가을 꽃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개성 강한 모습. 허태임 작가 제공

조금 더 오르다 보면 수리취를 만나게 된다. 수릿날은 단오를 일컫는 우리말이다. 선조들은 수리취로 만든 단오떡을 제단에 올리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수리취는 참취 못지않게 봄에 산나물로 사랑받는 식물이다. 참취꽃의 단정한 자태와 달리 수리취꽃은 뭔가 좀 괴괴하게 생겼다. 참취는 가운데 통꽃(통상화)이 노랗게 모여 피고 그 둘레를 하얀색 혀꽃(설상화)이 장식처럼 에워싸서 전체적으로 달걀프라이 모양이다. 하지만 수리취는 혀꽃 없이 통꽃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그 통꽃이 모인 덩이를 가시 모양의 꽃받침 조각들이 호위한다. 그래서 꽃이라기보다는 설치류 고슴도치를 닮았다. 정원에 심으면 가을꽃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일 거라고 식물 애호가들에게 권하고 싶은 꽃이다. 꽃송이는 네댓 살 아이의 주먹만 한 크기부터 어떤 건 내 주먹만 하다. 꽃대에 비하면 꽃이 큰 편이라 멀리서 보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산 아래를 응시하는 모양새다.

가을이 오면 전국 높은 산에서 짙은 보라색을 뽐내는 고려엉겅퀴. 산나물 '곤드레'의 진짜 이름이기도 하다. 허태임 작가 제공

가을이 오면 전국 높은 산에서 짙은 보라색을 뽐내는 고려엉겅퀴. 산나물 '곤드레'의 진짜 이름이기도 하다. 허태임 작가 제공

산정의 수리취 주변에는 으레 또 다른 산국화, 고려엉겅퀴가 산다. 산나물 ‘곤드레’의 진짜 이름이 고려엉겅퀴다. 가을이 오면 전국의 높은 산에서 그 꽃이 짙은 보라색으로 강렬하게 핀다. 이렇게 꽃 좋은 고려엉겅퀴가 나물로 사랑받게 된 이유는 보릿고개 겨우 넘던 시절에 사람을 살린 구황식물이었기 때문이다. 봄 다 지나면 성깔이 억세지는 여느 나물들과 달리 고려엉겅퀴는 오월과 유월이 와도 뻣뻣해질 기미가 없다. 그 보드라운 새순을 유지하는 고려엉겅퀴의 본성을 김남극 시인은 ‘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햇살도 한 평밖에 몸 닿지 못하는 참나무숲/ 새끼손가락만한 연초록 대궁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까실까실한/ 속은 비어 꺾으면 툭 하는 소리가/ 허튼 약속처럼 들리는/ 곤드레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나물만 알고 꽃은 왜 몰라보냐며 산국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가을이 이마에 바짝 다가왔다.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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