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가을 달래를 캐고 호미를 씻기 위해 계곡에 내려갔을 때였다. 커다란 바위마다 새하얀 구절초 꽃들이 바람과 계곡의 흐름에 따라 하늘하늘 몸을 흔들고 있었다. 3월 말, 돌단풍이 가득하던 바로 그 바위, 계절과 함께 바위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멋드러진 춤사위가 먼저였을까? 은은한 화향이었을까? 난 달래도 호미도 잊고 한참을 서서 꽃들의 군무를 바라보았다. 상상해보라. 어느 맑은 가을날, 찬란한 햇살을 배경으로 계곡 가득 춤을 추는 구절초 무리를!
구절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야생화다. 봄꽃은 복수초, 가을꽃은 물매화라지만 제일 좋아하는 야생화를 묻는다면 계절과 무관하게 무조건 구절초다.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박고도 굴하지 않는 기개가 부러워서일까? 아니면 그저 가을과 제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어느 청명한 가을, 아무도 오지 않는 계곡, 우연히 구절초의 군무를 만나본 사람은 안다. 왜 구절초가 야생화의 대표여야 하는지. 들꽃 중의 들꽃이어야 하는지.
바위구절초, 포천구절초, 남구절초… 구절초 종류는 많지만 내게는 오로지 구절초다. "다른 꽃은 어떻게든 이름을 구분하려 하면서 구절초는 왜 모두 구절초예요?" 몇 해 전 야생화 취재를 다니며 K기자가 따졌을 때도 난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내 마음이 구절초라는 이름만 받아들이려 하니. 누군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늘 이렇듯 막연하다.
아니, 구절초라고 모두 구절초일 수는 없다. 어느 아파트 화단의 구절초, 지자체 축제를 위해 심어놓은 화려한 구절초는 내 맘속에 없다. 그들은 그저 예쁜 꽃일 뿐 구절초는 아니다. 나의 구절초는 자연으로만 존재한다. 깊은 산 바위 틈새에 뿌리를 박고 새벽이슬로 간신히 연명하면서도 저렇게 당당하고 우아할 수 있어야 한다. 벌, 나비도 찾지 못할 듯한 외딴 계곡에서도 저렇듯 흥겹게 춤을 추어야 한다. 농막 경사지에 구절초, 감국, 산국 등 가을국화 수천 송이를 심어놓고도 때만 되면 구절초를 보겠다며 높은 산으로 외딴 계곡으로 달려가는 이유다. 구절초의 향기를 담기엔 세속은 너무 혼탁하기만 하다.
"어머니의 사랑." 구절초의 꽃말이 그렇다. 새하얀 꽃잎이 옛 어머니의 저고리를 닮아서일까? 아니면 꽃은 차와 술, 줄기와 뿌리는 약초, 얼마든지 자신을 내어주던 옛 어머니들의 희생을 닮았다고 여긴 걸까? 어느 쪽이든 어릴 때 어머니와 헤어진 나로서는 쉬이 와닿지 않는다. 구절초가 여성의 이미지여야 한다면 내게는 강한 여전사에 가깝다. 지독한 역경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채 온 세상에 깊고 진한 향을 전파하는 여전사. 구구절절 한을 품고도 꿋꿋하게 혁명의 깃발을 휘날리는 여전사… 아니면 저 가냘픈 줄기로 어떻게 제 몸을 의탁한 바위보다 강하고 당당하단 말인가.
나는 한참을 꽃멍(?)을 즐기다 꽃잎 몇 개를 따 농막으로 돌아간다. 아내한테 구절초 꽃차를 만들어주어야겠다. 따뜻한 물에 꽃잎을 띄우자 미색의 찻물이 우러나며 구수하고 은은한 향이 가득 피어오른다.
"구절초가 피었나 봐요."
"응, 다음 주가 절정이겠어요."
"그래요? 그럼 그땐 나도 데려가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분 못하는 놈하고는 만나지 말라고 시인 안도현이 그랬다던가? 꽃을 잘 모른다고 어찌 절교까지 하련마는 그런 이가 구절초 향을 느끼고 차를 맛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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