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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쇼

입력
2022.09.28 0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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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의례와 상징적 행동
그 자체로 큰 정치적 의미 지녀
치밀한 기획, 철저한 준비했어야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미국 브라운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커처(David Kertzer) 교수는 1988년 출간한 '의례, 정치와 권력'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의례(ritual)'와 '상징적 행동'이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지 설명한다. 커처 교수에 따르면, 의례와 상징적 행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의미를 가지며 현대 사회에서 정치 권력의 획득과 공고화는 물론이고 국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실례로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인종적 배경과 신념이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 결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며, 정기적으로 열리는 다양한 국가 의례는 미국 사회의 통합과 국가 정체성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의례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공식 행사에서 드러내는 일거수일투족의 상징적 행동 하나하나가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커처 교수는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얼마 전 영국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은 잘 기획되고 준비된 국가 의례의 좋은 사례이다. 전 세계에서 정상급 귀빈 500여 명이 참석한 장례식은 단순히 여왕의 서거를 추모하는 장례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쇼'였다. 우선 장례식이 열렸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지난 1,000년 동안 거의 모든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열렸던 장소로 건물 자체가 영국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한다. 또한 장례식 말미에 등장한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악단의 추모곡 연주는 분리 독립 목소리가 나오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이 하나의 국가임을 드러내주는 상징이었으며, 여왕의 지팡이를 부러뜨려 관 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여왕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이외에도 이번 여왕의 장례식은 다양한 의례와 상징을 통해 과거 대영제국의 영화를 일깨워주며 브렉시트로 분열된 영국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수행했다.

의례와 상징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드러내주는 사례는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1970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에서 무릎 꿇고 참배하는 모습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1977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가졌던 정상회담은 실질적 성과는 없었지만 만남 그 자체가 중동평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남북미 정치 지도자들이 직접 만나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에 대해 논의했던 지난 몇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또한 실질적 성과는 없었지만 만남 그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훌륭한 '정치쇼'였다. 특히 2019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함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던 행동은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한국전쟁 당시 적으로 만났던 미국과 북한이 정전체제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역사적인 '정치쇼'였다.

이에 비해 지난 주 외국 순방에서 보여준 윤석열 대통령의 '퍼포먼스'는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유엔 일본대표부가 위치한 건물로 직접 찾아가 일본의 기시다 총리와 가졌던 30분짜리 약식 회담, 글로벌 펀드 재정공약회의가 끝난 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인사를 나눈 바이든 대통령과의 '48초 스탠딩 환담'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왕 '정치쇼'를 할 거라면 치밀하게 기획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제대로 된 '정치쇼'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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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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