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의 집착으로 악몽을 겪고 있습니다. 출퇴근길에 태워주겠다고 해서 완곡하게 거절했는데도 괜찮다며 강제로 태웠습니다. 불편하다고 했지만 출퇴근길에 전화나 카톡을 보낸 뒤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장인 A씨
직장 동료를 끈질기게 스토킹한 뒤 잔인하게 살해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계기로 직장 내 젠더폭력 실태를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장 동료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구애 거절을 당하면 상대를 스토킹을 하거나 괴롭히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2020년 1월부터 이달까지 접수된 젠더폭력(성희롱 제외) 제보를 분석한 결과 총 51건 가운데 스토킹이 21.6%(11건)로 가장 많았다고 21일 밝혔다. 강압적 구애 15.7%(8건), 고백 거절 보복 13.7%(7건), 악의적 추문 13.7%(7건) 등이 뒤를 이었다.
젠더폭력은 특정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 때문에 겪는 괴롭힘, 갑질 등과 같은 폭력을 의미하는데, 여성 폭력이 우리 사회에 가장 만연한 젠더폭력의 형태다. 실제로 단체에 피해를 제보한 직장인들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짝짓기, 외모 통제부터 시작... '사귀자' 거절당하면 보복
직장갑질119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젠더폭력이 '짝짓기'나 '외모 통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성인 직원끼리 사귀라는 식으로 몰아가거나 이미 사귀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 외모를 평가하거나 복장을 지적하는 등 외모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 업무와는 무관하다. B씨는 "남자만 있는 팀에 배치됐는데, 팀장이 남자 동료와 나에게 '너네 둘은 반쪽이다. 항상 붙어다녀라'라고 지시하고 팀원들끼리 낄낄댔다"면서 "성희롱적 발언도 일상이었다"고 토로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스토킹, 강압적 구애 등으로 이어진다. 직장인 C씨는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남자 직원이 업무시간이 아닐 때 사적인 카톡을 거의 매일 보낸다"면서 "근무시간이 아닐 때 받는 카톡이 불편하다고 했음에도 '점심을 먹자' '저녁에 뭐 하냐'는 등 집요하게 만남을 요구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D씨도 "상사가 저녁을 먹자고 하고, 퇴근 후에는 본인 사무실로 불러 원치 않는 사적인 대화를 한다"면서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음에도 연락을 하고, 정규직으로 채용시켜주겠다며 만남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구애를 거절하면 보복이 행해진다.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거나, 가해자가 상사인 경우 피해자에게 퇴사를 강요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회사 대표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E씨는 "폭언, 협박, 업무 배제, 괴롭힘 등 보복이 이어졌다"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 강요하고, 집으로 찾아와 전화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상사의 구애를 거절한 F씨는 "상사가 내게 '후회하게 될 거다' '결국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며 "무슨 일을 당할까 두렵다"고 호소했다.
"연애, 성적 욕구 해소 대상으로 보기 때문... 문화 개선 시급"
직장갑질119는 젠더폭력이 여성을 직장 동료로 동등하게 보지 않고 연애나 성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성차별적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구애 거절 등으로 자신의 욕구가 해소되지 않으면 분노에 차 약자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명백히 젠더폭력임에도 '가해자가 피해자를 좋아해서 그런다'는 식으로 치부하는 문화도 문제다. 한 민원인에게 원치 않는 연락을 받고 있다는 G씨는 "연락이 괴로워 관리자에게 알리고 부서를 바꿨다"면서 "무슨 일을 당할까 두려운데 주변 동료들은 '민원인이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라며 아무 일 아닌 듯 말해 힘들다"고 했다.
여수진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한 명의 여성이 극단적 젠더폭력으로 희생되기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겪는 젠더폭력이 그 뒤에 숨어 있다"면서 "일터가 젠더폭력에서 안전한 공간이 아니란 사실이 증명된 만큼 직장 내 불평등, 조직문화 개선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직장갑질119는 이날부터 '직장 젠더폭력 신고센터'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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