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쟁이'는 병균이 아니라 병균의 희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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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쟁이'는 병균이 아니라 병균의 희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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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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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뷸리(1926.7.8~2022.6.26)

토머스 뷸리는 1960년대 아편 등 약물 중독자 치료-관리의 방향과 틀을 구축한 아일랜드 출신 정신의학자 겸 의사다. 그는 중독을 개인적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맥락에서 발병하는 만성 재발성 정신질환이라고 정의하며,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치료(cure)가 아닌 관리(care)가 필요하고, 환자 및 사회에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예방-처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단과 제안 덕에 수많은 환자들이 인간적인 치료 혜택을 받게 됐고, 현대사회는 약물 중독-해독 치료의 나침반을 얻었다. 가족 사진(© Susan Bewley).

19세기 아편전쟁을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부도덕한 전쟁이라고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속은 좀 후련해질지 몰라도 썩 온당한 평가는 아니다. 그 어떤 제국주의 침략전쟁도 '덜' 추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편’의 위상과 평판도 당시엔 지금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편은 영국에서도 오늘날의 아스피린이나 벤조디아제핀을 능가하는 값진 생약이었고, 영국 정부도 20세기 초까지 자국민의 아편 사용을 규제하지 않았다.
양귀비와 아편은 6000년 전 인류 문명이 시작된 자리에도 재배하고 즙을 짠 흔적이 있다지만, 인류가 '악마의 유혹’을 알아챈 것은 최근 100년 전후부터였다. 아편은 중세 아랍 상인 등에 의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삼각무역을 통해 기적의 만병통치약으로 세계로 확산됐고, 당연히 중국인들에게도 익숙하고 유용한 약재였다. 다만 현격한 수급 불균형 덕에 중독의 폐해가 구조적으로 통제될 수 있었다. 18~19세기 중국인이 겪은 아편 사태는 그 전까지는 없었던 집중 효과, 즉 단숨에 막대한 양이 쏟아져 든 탓이었다.

인류 최초의 합성 마약 ‘모르핀’도 19세기에 출현했다. 1806년 독일의 한 약리학자(Friedrich Sertuerner)가 생아편의 유효성분을 추출해 조제한 모르핀은 1827년 독일의 한 제약회사(Merck)에 의해 상품으로 출시되면서 통증 치료의 혁명을 낳았고, 1843년 피하주사 기술까지 개발되면서 대중화(중독)를 가속화했다. 1874년 영국의 한 생화학자가 모르핀 등을 원료로 즉효성 신종 마취-진통제 ‘헤로인’을 개발했고 코카나무 잎을 원료로 한 ‘코카인’도 저 무렵 등장했지만, 20세기 중엽까지 대세는 아편과 모르핀이었다.

미 의회가 1905년 아편 금지법을 제정한 이래 각국 정부와 국제 단체도 잇달아 마약 규제에 나섰다. 영국도 1920년 위험약물법(DDA)을 제정, 아편·코카인·모르핀·헤로인의 수입·소유·판매·보급 권한을 의사 등 허가를 받은 이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했다. 동네 가게 매대에 놓여 있던 모르핀이 그렇게 치워졌고, 25년 법이 개정되면서 코카 잎과 대마초도 규제 품목에 추가됐다. 그 사이 1차대전이 터졌고, 대다수 참전국은 자국 병사들에게 모르핀과 마약을 실탄과 함께 배포했다.

1924년 영국 보건부는 약물 중독 실태조사 및 예방을 위한 ‘부처간 위원회(일명 롤스턴 위원회)’를 구성했다. 2년 뒤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 요지는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였다. 위원회는 의사 재량으로 중독 치료에 금지약물을 처방할 수 있게 하고, 중독자 대다수가 범죄자나 하층민이 아닌 중산층인 만큼 형사처벌도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롤스턴 위원회의 저 온건한 마약 대처법은 미국 등의 강경책과 대비해 ‘영국 시스템’이라 불리고, 60년대까지 약 40년간의 과도기는 ‘롤스턴 시대’라 불린다.

양귀비의 즙액을 말린 아편은 기원전 400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 유적지에서도 흔적이 발견될 만큼 유서 깊은 물질로, 인류는 진정-진통 등 일종의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다. 인류는 19세기 아편전쟁을 계기로 아편의 치명적 중독성과 유해성에 눈을 떴고, 이어 등장한 모르핀 등 수많은 합성마약-중독과 전쟁을 시작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하지만, 60년대를 전후해 마약 해독 치료에 대한 낙관론도 기세가 꺾였다. 생화학과 분자생물학 등이 발전하고 연구가 심화하면서 중독의 거대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약물 중독이 개인의 일탈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도파민 중독’과 같은 인간 보편의 생리적 기전에 의해 작동되는 근원적 문제이며, 생리적 문제만도 아니라 삶의 질 등 다양한 환경에도 깊이 연루된 사회적 병리 현상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마약성 진통제를 능가하는 대체 약물 개발 노력도, ‘메타돈(1937)’ 등이 나오긴 했지만, 중독성 등을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각국 정부도 마약과의 전쟁 태세를 빠르게 전환했다. 사후 수습이 아닌 사전 통제, 즉 약물 사용에 대한 더 엄격한 규제와 강력한 법 집행, 중독자에 대한 연민 없는 격리와 배제. 60, 70년대 히피들의 저항은 공권력의 그런 규제에 대한 반작용 성격도 컸다.

역사적·사회적·의과학적 맥락과 별개로, 약물(의존-중독)에 대한 대중적 평판은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중독자는 방탕하고 해롭고 나약하고 더러운 존재였다. 예컨대 영국 작가 토머스 드 퀸시가 아편 중독-극복의 체험을 기록해 큰 반향을 일으킨 자전 에세이 ‘아편 중독자의 고백’(1822)은 마약에 대한 경각심과 더불어 약물(중독)의 사회적 성격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중은 중독자에 대한 연민보다 중독에서 못 헤어나오는 이들의 정신적 무능과 타락을 타매했고, 20세기 문학과 대중문화가 그 경향을 강화했다. ‘아편쟁이’ 남편이 젖먹이를 둔 아내를 ‘되놈’ 상인에게 파는 이야기(강경애의 단편 ‘마약, 1937’) 등을 통해 대중은 중독자를 알아갔다.

청나라 말기 아편을 흡입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국제 사회는 20세기 들어서야 아편 사용-판매 등에 대한 법적인 규제를 시작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저 60년대 ‘마약 전쟁’의 들머리에, (약물)중독자는 격리-배제해야 할 병원체가 아니라 병균의 피해자 또는 희생자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아니라 복잡한 원인과 메커니즘에 의해 발병하는 정신질환 환자라고 주장한 이가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 정신과의사 겸 의학자 토머스 뷸리(Thomas Bewley, 1926.7.8~ 2022.6.26)였다.

그는 60년대 의학저널 ‘란셋(Lancet)’과 ‘영국의학저널(BMJ)’에 발표한 일련의 논문을 통해 중독은 완치가 불가능한 ‘만성 재발성 장애(chronic relapsing disorder)’이고, 따라서 치료(cure)가 아닌 관리(care)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피해의 최소화(harm reduction)가 관리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4년 봄 란셋 논문에서 그는 당시 극히 미미했던 헤로인-코카인 중독이 향후 아편과 모르핀 못지않게 엄청난 사회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며, 의사 일반에 부여된 마약성 약물 처방권을 자격을 인정받은 소수로 제한하고 중독 환자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병동과 병원을 신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통념을 거스른 그의 예측과 진단, 처방은 결과적으로 대부분 옳았고, 오늘날 전 세계 거의 모든 약물 중독 관련 병원과 기관 단체가 저 원칙에 준해 환자를 관리한다. 마약-중독 전쟁의 최전선에서 최대한 인간적이고 실질적인 해법을 찾고자 애썼던 그가 호흡기 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중독은 ‘만성 재발성 장애’여서
치료(cure)가 아니라 관리(care)해야 하며,
피해의 최소화(harm reduction)에 역점을 둬야 한다."

Thomas Bewley

토머스 뷸리는 아일랜드가 갓 독립한 무렵 수도 더블린의 저명한 정신과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여동생도 정신과병원 의사였고, 어머니도 의대 출신이었다. 대대로 그의 집안은 금욕과 구휼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퀘이커(Quaker) 교도였다. 사업가였던 증조부는 경영 파트너가 술을 취급하려 하자 아예 사업을 접고, 퀘이커 교도들이 금욕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더 원리주의적 종교집단(‘배타적 형제단, Exclusive Brethren’)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 뷸리는 더블린과 런던의 엄격한 사립 기숙학교를 전전하며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독서광이었던 그의 꿈은 저널리스트나 문필가가 되는 거였지만, 자의반 타의반 1950년 더블린 트리니티칼리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그리고 당시 알코올 등 약물중독 치료의 권위자로 손꼽히던 더블린 성패트릭병원 의사 노먼 무어(Norman Moore)의 지도로 그 길에 접어들었다. 2차대전 직후였고, 약물 중독 환자가 넘쳐나던 때였다. 그는 51년 의대 4년생이던 뷸라 녹스(Beulah Knox)를 만나 55년 결혼했고, 아내의 학교와 직장을 따라다니며 임상과 연구를 병행했다. 57년 아내가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한 병원 소아과의사가 되자 그도 동행, 현지에서 인종집단별 알코올 중독 증상의 차이를 연구해 논문을 썼다.

그의 연구는 60년대 런던 투팅벡(Tooting Bec) 정신병원을 무대로 주로 이뤄졌다. 2007년 6월 영국정신의학회보 인터뷰에서 그는 50년대 말 자신이 부임할 당시 그 병원 입원환자 2,100명 중 1,900명이 고령의 치매 환자였고 나머지는 병원이 자체 간호사 양성 교육을 위해 수용한 환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중독(자)은 법과 윤리-종교의 영역이며, 의료적 개입을 하더라도 마땅한 방법이 없고 효과도 별로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던 때였다.

그는 일부 빈 병상에 중독 환자를 수용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알코올 중독 환자 치료 과정을 지켜본 한 전공의가 그에게 해준 말을 그는 훗날 소개했다. “뷸리 박사님, 당신이 하는 일을 말해볼까요. 당신은 경찰이 지저분한 몰골로 손발을 덜덜 떨며 혀를 빼문 이들을 데려오면, 우선 목욕시켜 옷을 갈아입힌 뒤 침대에서 자게 합니다. 어느 정도 해독이 되면 치과 등 건강검진을 받게 하고, 별 이상이 없으면 환자 스스로 살 집을 구할 만한 돈을 마련할 때까지 바깥에서 일하게 합니다.” 뷸리는 그 과정을 ‘술고래 검진법’이란 의미로 ‘1만 갤런 검진(10,000 gallon check-up)’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영어 'cure(치료)', 'care(관리)', 'treatment(처치)' 등이 대개 '치료'로 번역되는 경향 때문에 더러 오해도 빚어진다. 미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는 중독 '치료'에 항상 'treatment'란 단어를 쓴다. nida.nih.gov

알코올 중독자 치료 모임인 ‘알코올릭 어나니머스(Alcoholics Anonymous)’ 등을 통한 집단 심리치료 지원이 당시 알코올 중독자에 대한 국가 정책의 기조였다. 뷸리는 “경미한 일부는 그 과정을 통해 음주 습관을 통제할 수 있지만, 의존증이 심한 이들은 그걸로 부족하다.(…) 어떤 약물에 중독된 것이든, 우울증이든 정신분열증이든, 환자의 약 10%는 자살로 사망할 것이고 그게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국가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도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합리적 조언과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2007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헤로인 중독자를 대하는 방식도 대동소이했다. 외래 헤로인 중독자들이 주사기를 돌려 쓴다는 사실을 알고는 외래 창구를 통해 소독된 주사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것도 ‘피해 최소화’의 한 방편이었다. 그는 중독자 관리를 위한 특별 병동과 병원 신설, 전문 의료인 양성 프로그램 개설을 촉구했다.

그의 제언들은 58년 출범한 2차 ‘부처간 약물중독 위원회(일명 브레인 위원회)’의 1964년 보고서에 대부분 반영됐다. 보고서는 일부 의사들의 마약성 약물 과다 처방이 중독 사태의 원인 중 하나라며 처방 권한 범위를 대폭 축소할 것과 중독자를 위한 특별치료센터(DDU) 설립을 정부에 제안했다. 당시 만 38세의 젊은 의사였던 뷸리는 일약 중독 케어의 권위자로 주목받았다. 훗날 그는 “당시 나도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나보다 더 몰랐다”고 말했다. 란셋은 뷸리 특유의 자기비하성 농담으로 저 말을 소개했지만, 어쩌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2007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치료(cure)보다 관리(care)를 통해 중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훨씬 많다는 단순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환자의 증상이 표나게 호전돼 그를 다시 안 만나도 된다면 그건 일종의 보너스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당신은 평생 그들을 보살펴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칭 ‘퀘이커 무신론자’였던 그는 자신이 교육받은 종교적 교리의 반대편 극단에 내몰린 이들을 그렇게 신앙적 헌신으로 대했다. 약물중독 증상을 겪는 다수의 의사들도 보살폈고, 영국 정부와 세계보건기구(WHO) 마약정책 자문역으로도 활약했다. 정부기관의 정신과 의료행위에 대한 과도한 개입에 맞서 영국 정신과 의사들이 조직한 ‘임상정신과의사협회’의 창립 멤버였고, 정신과의사 양성-재교육 기관인 왕립정신과의사대학(Royal College of Psychiatrists) 이사와 총장(1984~87)을 지냈다. 총장 재임 중 그는 대학에 약물의존연구소와 약물오남용 연구 전문과정을 신설했다. 2000년대 은퇴 후에는 왕립정신과의사대학 역사를 ‘광기에서 정신질환까지(Madness to Mental Illness, 2008)’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뷸라 뷸리(왼쪽)와 토머스 뷸리는 51년 더블린 트리니티대학 의대에서 만나 55년 결혼, 뷸라가 숨지던 2018년까지 해로했다. 뷸라는 50년대 영국 의료계의 젠더 장벽을 극복한 입지전적 의사로, 또 공공보건 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겼다. 토머스와 뷸라는 각각 영국 정부 훈장(CBE, DBE)을 받았다.

토머스-뷸라 뷸리 부부는 2003년 먼저 보낸 다운증후군 딸 세라(Sarah, 당시 만 44세)를 포함 5남매를 낳아 길렀다. 아내 뷸라(1929~2018)도 의학계의 두터운 성차별을 뚫고 소아-여성의학자로서, 공중보건 행정가로서, 정부 보건 및 가족계획 정책과 여성 의료인 권익 신장에 큰 족적을 남겼다. 공적인 자리에선 언제나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를 멘 양복 차림을 고수했던 퀘이커 중독학자 뷸리는 80년대부터 회의실 실내 금연과 점심 반주를 철저히 금한 일화로 ‘악명’ 높았지만, 퇴근 후 아내와 나누는 기네스 맥주 타임은 지나치는 예가 드물었다. 대학 시절 외식 동아리에 가입하려다 남성에게만 회원 자격을 부여하는 규정이 못마땅해 돌아선 적 있다는 그는 자신의 성취보다 아내가 이룬 성취를 더 자랑스러워했고, 집에서 파티를 열 때도 ‘스몰토크’에 약하다는 핑계로 설거지를 도맡았다고 한다. 은퇴 후 런던 코번트가든 근처에 집을 마련해 아내와 함께 오페라 공연을 보는 게 말년의 낙이었다는 그는 뷸라가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게 되면서 런던 교외 윔블던으로 이사, 2018년 사별할 때까지 아내를 보살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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