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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에선 '영웅', 러시아에선 '배신자'...냉전 종식한 고르바초프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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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에선 '영웅', 러시아에선 '배신자'...냉전 종식한 고르바초프 영면

입력
2022.08.31 19:00
수정
2022.08.31 21:1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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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정책으로 소련 변화 이끌어
냉전 끝낸 공으로 노벨평화상 받기도
소비에트 연합 해체, 동구권 붕괴 가속화
생전 우크라이나 침공 비판도

2009년 10월 31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9년 10월 31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냉전체제’를 종식시킨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91세.

러시아 타스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에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그의 유언에 따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묻힌 부인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옆에 안장될 예정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며 유족과 지인들에게 애도의 전보를 보냈다고 밝혔다.

개혁ㆍ개방 정책으로 소련의 변화 택해

1991년 1월 13일 당시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991년 1월 13일 당시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을 이끈 인물이다. 1931년 러시아 남서부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1985년 54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권력의 정점에 섰고, 1990~1991년에는 대통령을 지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업적으로는 소련의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바꾸려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이 가장 먼저 거론된다. 그는 소련이 효과적으로 경제 발전을 하려면 미국과 반세기 넘게 지속된 냉전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여겼다. 냉전에 쓰는 군비를 경제개발에 돌리면 소련이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체제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쇠퇴하자 변화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여겼다”며 “그가 소련에서 내세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시장 주도 자본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 비전을 압도했다는 걸 방증했다”고 전했다.

1989년 12월 미국 정상 만나 냉전 종식 공식 선언

2001년 4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당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 소련 대통령의 모습. AFP 연합뉴스

2001년 4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당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 소련 대통령의 모습. AFP 연합뉴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그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정치범 석방 △공개 토론 및 다중 후보자 선거 허용 △여행과 이민 기회 확대 △종교 탄압 중단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등의 조치를 잇따라 취했다. 시장 자본주의를 도입해 심각한 경제난에 처한 러시아 사회를 개조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특히 1989년 12월에는 몰타에서 조지 H.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냉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회담 직후 미국과 소련 정상은 "세계가 냉전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선언했고, 이듬해 미국 워싱턴에서 다시 만나 장거리 핵미사일과 화학무기 등을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냉전 해체의 주역이자 평화 구축, 동구권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동유럽 국가들, 자결권 요구...소련 해체 과정 밟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2019년 9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 행사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2019년 9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 행사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방문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내세운 개혁·개방 정책이 갖고 올 파괴력에 대해선 완전히 알지 못했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공산주의 사회의 폐쇄성을 해체하고 개방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1989년 민주화 시위가 동유럽 공산주의권 국가를 휩쓸자 각국에서 자결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해 단 5개월 사이에 발트해부터 발칸반도까지 공산국가들이 무너져내렸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도 동유럽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서독 통일을 용인하는 등 이들 국가에 자유를 내주는 선택을 했다.

소련의 초대 대통령인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 이후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데 실패했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소련 해체를 주도하자 그해 12월 사임했다. 1922년 12월 30일 건국된 소련도 만 69년이 되기 직전인 1991년 12월 26일 공식 해체됐다.

고르바초프, 생전에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판도

1991년 7월 31일 당시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러 기자회견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오른쪽) 소련 대통령과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991년 7월 31일 당시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러 기자회견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오른쪽) 소련 대통령과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에 따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서방에선 냉전을 종식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자국에선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동구권을 서방에 넘겨준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여 민족 갈등과 소련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거셌다.

실제 당시 러시아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시장 자본주의를 서둘러 도입하면서 물가 급등과 마이너스 성장 등 최악의 경제위기가 초래됐다. 러시아 국영 여론조사기관이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0% 이상은 “그의 집권 기간 러시아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답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생전에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판적 입장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가 이끈 '고르바초프 재단'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틀 뒤인 올해 2월 26일 성명을 통해 "우리는 조속한 적대 종식과 즉각적인 평화 협상 개시 필요성을 확인한다"면서 "이 세상에 인간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 추모 메시지..."그의 유산을 잊지 않을 것"

2007년 10월 15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오른쪽) 전 소련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 AFP 연합뉴스

2007년 10월 15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오른쪽) 전 소련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 AFP 연합뉴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이날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에 추모 메시지를 쏟아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고르바초프는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는 상상력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경력을 걸고 용기를 낸 보기 드문 지도자"라며 "그 결과 수백만 명이 더 안전한 세상과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트위터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냉전을 평화로운 결말로 이끌었던 용기와 진정성을 항상 존경해 왔다"며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는 이때, 소련 사회를 개방하려던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트위터에 "냉전을 종식하고 철의 장막을 걷어내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자유로운 유럽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며 "우리는 그의 유산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김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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