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인 전 총리 부인 판결문 공개 파장
비리 혐의 빼곡히 적혀 여론 악화
여권 '조기 총선'으로 승부수

한국일보가 입수한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부인 로스마 만소르 사건에 대한 판결문 초고의 첫 장. 해당 페이지에는 재판부의 초고 작성 시작일(6월 24일)과 완료일(6월 28일), 피고인 및 사건번호 등의 내용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그대로 공개돼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국부기금에서 거액의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나집 라작 전 총리 사건이 말레이시아 정국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다. 상황을 수습해 보려던 현 정권은 이번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된 전 총리 부인의 재판 판결문 초고까지 공개되자 결국 '조기 총선' 카드를 만지기 시작했다. 여론이 더 악화하기 전 최후의 승부수를 던져서라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공개된 판결문 초고, 비리 정황 총망라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부인인 로스마 만소르가 지난 6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출두하고 있다. 이날 재판에서 로스마는 "수사 초기 압수된 나의 명품 등이 유성펜으로 훼손됐다"며 정부에 보상을 요구해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말레이시아 투데이 캡처
29일 말레이시아 투데이 등 현지매체에 따르면, 비자금 조성과 자금 세탁 등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나집 전 총리의 부인 로스마 만소르는 내달 1일 1심 선고공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26일 갑자기 현지 인터넷상에 로스마 사건에 대한 1심 판결문 초고가 공개됐다. 선고 5일 전 사법부의 판결 방향성이 미리 공개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법원은 "초안일 뿐 확정된 판결문이 아니다"라며 해명했지만 상황은 나집 전 총리 측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판결문 초고 안에 나집 전 총리 일가 비리 사건의 전말이 여과없이 담기면서 민심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나섰다. 현재 당국은 초고가 유출된 경위 및 최초 유포자 색출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악으로 흐르는 여론, '조기 총선' 추진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지난 23일 푸트라자야에 위치한 연방법원으로 출석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푸트라자야=EPA 연합뉴스
판결문 초고 공개는 사법부뿐 아니라 현 정권에도 심각한 타격이 됐다. 나집 전 총리 비리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공개로 민심 이반을 막으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집 전 총리의 정치적 기반이자 지난 2020년 집권에 다시 성공한 여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재빨리 정국 대응 전략을 수정했다. 당초 UMNO 내 강경파가 주장하던 조기 총선 실시 방안을 수용, 의회 즉각 해산까지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기 총선 실시는 더 깊게 고민해야 한다"던 UMNO 소속의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현 총리도 입장을 선회했다. "'반(反)정권' 기류가 확산하는 것을 총선 실시라는 이슈로 막아야만 집권 연장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여당 논리에 동의한 것이다.
정권 교체 덕에... 전 총리 사건 공개 가능

지난 25일 말레이시아 연방법원의 모습. 연방법원은 앞으로 나집 라작 전 총리의 남은 35개 혐의 및 그의 부인과 측근들에 대한 최종심을 진행해야 한다. 푸트라자야=EPA 연합뉴스
나집 전 총리 비리 사건은 지난 선거에서 야당이 처음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1957년 독립한 말레이시아는 이후 61년 동안 UMNO가 장기 집권한 나라다. 그러나 UMNO는 2018년 총선에서 패하면서 정권을 뺏겼고, 신정권은 의혹만 무성하던 나집 전 총리의 각종 비리 의혹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나집 전 총리와 측근들이 그들의 집권 시기에 만든 국부기금 1말레이시아개발유한공사(1MDB)를 통해 45억 달러(6조772억 원)를 횡령 및 유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 중 나집 전 총리가 개인적으로 착복한 금액은 7억 달러(9,453억 원)에 달했다.
이후 42개 항목으로 기소된 그는 지난 2020년 7월 첫 7개 혐의에 대한 1심 선고에서 징역 12년과 벌금 2억1,000링깃(592억 원)을 선고받았다. 지난 23일 최종심인 연방법원에서도 같은 형량이 확정됐다. 현재 나집 전 총리는 구속돼 카장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다.
동남아 외교가 관계자는 "연방법원이 실형을 확정한 이상 나집 전 총리의 남은 혐의도 유죄로 판단될 것이 유력하다"며 "부인 로스마와 주요 측근들의 최종 선고 일정까지 고려하면 1MDB사건은 말레이시아 차기 총선의 최대 뇌관으로 계속 작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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