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열풍 주역
대학 전공 책 다시 꺼내 보고
① 동영상 보며 모방하지 말고 ② 증상에 집착하지 말자는 금기 세워
"자폐인의 실생활을 수단 삼아 연기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종방 인터뷰로 만난 박은빈의 테이블에는 고래가 그려진 보라색 노트가 올려져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인 우영우를 바라보는 심경을 적어둔 노트라고 했다.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박은빈은 "영우 연기가 누군가에게 불쾌함을 주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 등을 적었다"고 말했다. 7개월을 우영우로 산 박은빈은 취재진의 명함을 받자 두 줄로 오와 열을 맞춰 테이블 위에 정리했다. 늘 흐트러짐 없이 김밥 줄을 맞추던 우영우의 습관처럼. "제 성격이 원래 이래요, 하하하."
박은빈은 '우영우' 성공의 주역이었다. 섬세한 연기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1화에서 로펌 한바다를 찾은 할머니가 22년 전 본 영우가 변호사로 자란 것을 보고 "어머 세상에"라고 놀라며 손뼉을 여러 번 치는 장면. 화면 오른쪽 하단엔 우영우가 양손을 두어 번 치는 모습이 흐릿하게 나온다. 박은빈이 카메라를 등진 촬영에서도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는 자폐인을 표현한 것이다.
우영우에 더 다가가기 위해 박은빈은 대학교 졸업 후 덮어 뒀던 전공(심리학) 책도 지난 겨울에 꺼내 읽었다. 그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 기준을 참고했다"며 "작가와 감독, 드라마 자문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영우의 캐릭터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박은빈은 ①동영상을 보며 다른 자폐인을 모방하지 않고 ②증상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금기를 세웠다. "자폐인의 실생활을 수단 삼아 연기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고, 증상에 초점을 맞추면 드라마의 메시지가 가려질 수 있어 걱정했다"는 게 이유였다.
"제일 고민했던 것은 자폐인 가족들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는 방향이 어느 쪽일까였어요. 영우가 세상을 마주하고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를 진실되게 보여 주자는 마음뿐이었고요. 마지막 회가 끝난 뒤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가족 중에 영우 같은 장애인이 있다고요. 처음 들은 얘기라 깜짝 놀랐죠. '우영우'가 방송된 뒤 '이젠 자폐인의 반향어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좀 줄어들 거 같다. 그런 점에서 고맙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힘이 됐죠."
박은빈의 바람처럼 '우영우'는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그는 가장 마음에 남은 촬영으로 마지막 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어머니 태수미(진경)와의 대화를 꼽았다. 길 잃은 외뿔고래를 얘기하며 '모두가 저와 다르니까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저를 싫어하는 고래도 많다. 그래도 괜찮다. 이게 내 삶이니까.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한 장면이다. 박은빈은 "자폐인을 넘어 이 세상의 모든 외뿔고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했다.
'우영우'는 박은빈에게 '무거운 왕관'이기도 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우영우처럼 무해하고 천재인 자폐인은 현실에선 찾기 어렵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우영우'를 계기로 공정과 역차별 문제에 대한 갑론을박도 다시 가열됐다. 첫 회 0.9%(닐슨코리아 집계)에서 시작한 시청률이 마지막 회 17.5%로 눈덩이처럼 불어날수록 박은빈은 "무서웠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드라마다 보니 캐릭터의 비현실성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너무 많은 분이 봐 주면 더 다양한 반응이 나올 테고 그래서 두려웠다"는 게 그의 말이다.
26년 동안 일탈 없이 묵묵하게 카메라 앞에 서 온 '똑순이 배우'는 15년여를 그의 매니저 역할까지 한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결국 무너졌다. "'우영우'로 너무 큰 사랑을 받아 감사한데 제 모든 걸 알고 있는 어머니는 홀로 감내해야 할 것들을 아시니까 마냥 좋아하시지만은..." 박은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박은빈은 1996년 아동복 모델로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열 살이 채 안 됐을 때 '백야 3.98'(1998)과 '명성황후'(2001) 등의 선 굵은 작품에 출연해 무리 없이 연기를 한 박은빈은 어느 순간 도전의 아이콘이 됐다. 단아한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2016년 '청춘시대'에서 '취직보다 섹스'를 외치는 당찬 대학생으로 돌변하더니 최근 1년 동안 남장여자 왕('연모')과 자폐인 등 잇달아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줬다.
뒤틀림 없는 성장의 밑거름은 '거리두기'였다.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저와 배우로서의 삶을 분리하는 법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카메라가 꺼지면 온전히 박은빈의 삶에 집중하는 편이고요." 박은빈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그는 양쪽에 토끼 인형을 단 고무신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토끼 덕후'로 팬들에 소문난 박은빈에게 토끼는 우영우의 고래 같은 존재다. 26년 차 배우의 마음엔 여전히 동심이 자라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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