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철학]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공무원도 주민도 "40대 초반 면장이 제대로 할까?"
청년 모임 '송림동우회' 모든 일에 솔선수범 면장 도와
군민체육대회 최초 우승 통해 면민들의 화합 도모
"너무 젊어. 일 제대로 하겠나?"
1986년, 40대 초반에 면장(경북 의성군 금성면)이 된 후 여기저기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성군에서 최연소였고, 역사상으로 봐도 가장 어린 면장이었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면사무소 직원들도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청년 모임인 송림동우회였다. 이들은 기대와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금성면 지역의 청년들이 뭉쳐서 결성한 송림동우회는 JC(한국청년회의소)가 질투할 정도로 열심히 또 많은 활동을 했다. 이를테면, 병충해 방제 작업을 하면 송림동우회 회원들이 방제단을 꾸려 봉사에 나섰다. 어떤 사업을 펼치든 송림동우회가 앞장을 섰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청년들이 지역을 변화시키는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겠다는 열망을 안고 있었던 까닭에 늘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지역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자 면에서 무슨 사업을 펼치든 활력이 돌았다. 청년들 역시 지역의 현안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하면서 우리 사는 마을과 동네가 달라지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 회원들이 회비를 갹출해 송림동우회 회관을 지어올리기도 했다. '젊은 면장'에 대한 호평은 덤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성과가 쌓이기 시작하자 지역민들은 물론 면사무소 직원들 사이에서도 "젊은 면장이 오히려 낫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금성면에서 지역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청년들의 활동이 면의 분위기를 바꾼 데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다. 사실 금성면은 지역 갈등이 심각했다. 39개 마을이 제각각이었다. 모내기, 보리 베기, 병충해 방제 등은 마을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지만 "내 팔 내가 흔들겠다"는 식으로 나오니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정 사항이 제대로 추진된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면 따로 주민 따로였다.
금성면은 사실 네 개의 면이 하나로 합쳐진 지역이다. 원래는 억곡면, 산운면, 조문면, 운곡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13년 운곡면과 조문면이 합병하고 산운면과 억곡면이 합쳐져서 각각 조문면, 산운면이 되었고, 1933년에 2차 통합이 성사돼 산운면과 조문면이 지금의 금성면으로 결정됐다.
4개 면이 하나가 된 70년이 넘어가는 즈음이었으나 갈등은 여전했다. 농협이나 축협에서 대의원이나 이사를 뽑는 선거에서도 지역간의 대립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무조건 '됨됨이보다 출신 지역'이었다. 쓸데없는 대립과 경쟁이 심했다.
이런 분위기를 확 바꾼 것이 청년들이었다. 젊은 만큼 편견과 고정관념이 엷었다. 청년이라는 강렬한 동질감 덕분에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지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 면에서 펼치는 행정이 마을 구석구석까지 파급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우리 동네, 남의 동네 할 것 없이 자기 일처럼 뛰어들어준 청년들 덕분에 늘 문제가 되었던 지역 갈등이 자연스럽게 숙어 들었다. 청년들의 마음에는 '금성면'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내 동네'가 아니라 '금성면'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
면사무소 뒷문 바로 앞에 국보급 석탑이 서 있었던 이유
"면사무소가 왜 여기에 있죠?"
금성면에는 오랜 숙원 사업이 하나 있었다. 바로 면청사 이전이었다. 33년에 합병된 이후에 지은 청사는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위치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면사무소 뒷문 앞에 국보 77호 석탑이 있었다. 뒷문을 열고 나가면 갑자기 국보가 나오는 황당한 구조였다. 어느 지역 어르신에게 면청사를 위치를 정할 때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33년에 산운면과 조문면 양 지역 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면사무소 자리를 정했는데, 실랑이가 끝나질 않는 거라. 그래서 그냥 자 들고 와서 두 지역의 정 중간에 세우기로 했어. 교통의 이점이나 마을이 자리잡은 위치 같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지. '정중앙'이 대원칙이었어. 그래서 그 너른 땅을 모두 놔두고 그 자리에 앉게 된 거지."
면사무소 이전을 위해서는 여론 조성이 필요했다. 지역 갈등은 청년들 덕분에 그나마 완화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드디어 때가 된 셈이었다. 허리 세대가 적극적으로 부모 세대를 설득하자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면사무소를 이전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 "행정의 신화를 만든 청년 면장" 칭찬
청년들의 활동과 함께 주민들을 하나로 묶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면민체육대회였다. 1989년에 면사무소 준공식과 면민체육대회를 함께 개최했다. 대회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 역시 청년들의 역할이 컸다.) 급기야 그 뜨거운 열기가 의성군을 집어삼켰다. 1990년대 초반 의성군민체전에서 금성면이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금성면은 의성에서 가장 큰 면이었으나 한번도 군민체전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다. 면민들이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된 덕분에 그간의 숙원을 풀었다.
그 즈음 누군가 내게 말했다. "행정의 신화를 만든 사람" 지금도 그 평가를 기억하고 인사치레로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칭찬을 하면 나는 "거들기만 했다"고 말한다. 주역은 청년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르신들도 내 마을, 네 마을 아웅다웅하면서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면민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행복하게 잘 사는 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들이 있었다. 다만 큰 흐름을 거역하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청년들이 두 손 두 발 다 걷고 오래도록 박혀 있던 돌들을 치우자 주민화합이라는 도랑물이 시원하게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어느 시대든 청년층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경륜과 경험이 최고라는 생각에 늘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서툴고 실수할 때도 많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뛰어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순수해서 옳은 일에 대한 실행력은 기성 세대가 오히려 따를 수 없다. 이 거대한 에너지를 우리 사회가 온전히 받아주지 못한다면 가장 중요한 발전 동력 하나를 걷어 차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젊음을 품어주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그들이 열심히 뛸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것은 '청년 이상문'이 그 젊은 나이에 지역사에 두고 두고 잊히지 않을 신화를 쓸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청년이 자기 자리에 곧게 설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지역과 나라의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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