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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반지하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입력
2022.08.18 16:0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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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 일상을 덮칠 기후위기, 어떻게 다뤄야 할까

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ㆍ리베카 헌틀리 지음ㆍ이민희 옮김ㆍ양철북 발행ㆍ320쪽ㆍ1만6,000원

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ㆍ리베카 헌틀리 지음ㆍ이민희 옮김ㆍ양철북 발행ㆍ320쪽ㆍ1만6,000원

한참 전의 일이다. 명망 있는 사회운동 원로가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기후 위기, 에너지 전환 등을 놓고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분이 격앙되어서 ‘재앙이 한번 와야 다들 정신을 차리지!’ 이렇게 말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말끔한 옷차림의 중산층 청중 상당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서 불편한 말참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모르니 기후 재앙이 세게 한번 덮쳐야 해, 핵에너지의 위험을 모르니 핵발전소 사고가 나야 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런 접근은 무책임할뿐더러 부도덕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재앙이나 사고가 시민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런 재난은 사회의 가장 약자에게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줍니다.”

이번에 서울 한강 이남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집중호우 피해를 보면서 이 일화를 다시 떠올렸다. 상징성이 있어서 빗물에 잠긴 강남 중심지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생명을 잃어 정말로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맞닥뜨려야 했던 이들은 허름한 동네의 반지하에서 살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재난의 결과는 불평등하다.

밤새 불어난 빗물이 집안으로 밀려오지 않을지 전전긍긍하다 결국 생명을 잃은 힘든 이웃에게 이번 재난의 진짜 이유가 기후 위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일은 얼마나 허망한가. 과학자 다수가 온갖 증거를 들이대면서 1990년대부터 30년이 넘도록 '지구 가열'(global heating)과 기후 위기의 위험을 경고해도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 대목에 있다.

리베카 헌틀리.

리베카 헌틀리.

리베카 헌틀리의 '기후 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지구가 데워지고 있고 그 결과로 기후 위기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과학 증거만으로는 시민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한계가 또렷하다. 사람은 이성의 호소보다는 감정의 목소리에 솔깃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도의 멸종’이나 ‘2050 거주 불능 지구’ 같은 ‘붕괴 포르노(Collapse Porn)’는 어떨까. 글머리에 언급한 사회운동 원로를 포함한 여럿이 솔깃해하는, 기후 재앙으로 금세 인류 문명이 결딴날 수 있다는 겁주기로 시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기후 위기 이슈와 시민의 다양한 반응을 따져본 연구에 따르면 되레 역효과만 난다.

여타의 포르노가 그렇듯이 붕괴 포르노도 자극적이라서 일시적으로 대중의 눈길을 끌 수는 있다. 대중매체가 붕괴 포르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는 “행동을 억제하고” “도망가도록” 유도하는 감정이다. 붕괴 포르노의 공포에 노출된 시민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재앙에 움츠러들고, 나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진다.

지난 12일 집중호우로 일가족의 참변이 발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에 희생자를 애도하는 조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지난 12일 집중호우로 일가족의 참변이 발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에 희생자를 애도하는 조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가르치고(과학자) 겁주기(붕괴 포르노)가 아니라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헌틀리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기후 위기를 놓고서 다양한 당사자가 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는 제안이다. 여기서 말하는 당사자에는 과학자, 기업인, 정치인, 환경운동가처럼 평소 목소리 큰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이 포함된다.

여름 폭염 탓에 에어컨 없는 쪽방에서 ‘더워 죽을’ 걱정을 해야 하는 노인의 이야기. 큰비만 내리면 반지하 집에서 ‘익사할’ 걱정해야 하는 이웃의 이야기. 탄소와 오염물질을 내놓으며 오래된 화물차로 생계를 꾸리는 운전기사의 이야기. 졸지에 ‘공공의 적’이 된 석탄 화력 발전소 노동자의 이야기 등.

이렇게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이웃에게 기후 위기와 자신의 삶을 연결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빨리, 많이 이뤄졌다면 큰비에 반지하 집에서 생명을 잃은 이웃의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기후 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를 떠올리는 마음이 씁쓸하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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