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서 활용할 기술 위해 '내돈내산' 축구클럽 등록
'탈압박' '순두부터치'에 '시저스 페이크 드리블'까지
"왜 초등시절 운동장서 축구할 생각 못 했나 아쉬워"
국제학교 중국어 교사도 퇴근 후 축구..."활력 생겨"
"우리 회사에 축구하는 여직원이 있다고요?"
그것도 축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사는 것)'으로 학원을 다니는 여성이 있다. 축구 동호회에 들어가 공을 차는 취미활동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드리블과 패스, 슈팅 등 디테일한 축구 기술에 목말라 직접 축구 레슨을 받는 사람이다. 보는 축구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뛰는' 축구에 매료된 것이다. 어찌 보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진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골때녀(골 때리는 그녀들)'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다니는 회사에도 '골때녀'가 있다. 직장인 변한나(32)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구로구에 있는 축구교실에 다니며 벌써 8개월째 축구 수업을 받고 있다. "발목에 물이 차서 슛을 세게 못 한다"는 그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축구를 꾸준하게 열심히 해왔다는 방증.
서울이 잠긴 지난 8일 오후. 변씨는 퇴근 후 축구화와 유니폼을 담은 큼지막한 가방을 메고 지하철 1호선 구로역으로 향했다. 축구하는 날만 기다린다는 그에게 폭우나 폭설은 그리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당시엔 예상하지 못했지만 변씨는 이날 폭우로 인해 귀가하지 못할 뻔했다. 도대체 축구의 어떤 매력이 그에게 축구화를 신도록 만든 것일까. 그를 한번 따라가 봤다.
'탈압박' '순두부 터치' '불꽃 슛'은 그녀들에게도 있다
100여 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해가 떨어진 늦은 오후 오로지 '축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뭉친 사람들이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이들은 '골 때리는 여성'들이다. '내돈내산'으로 축구를 배우며 기술을 터득하고 실전에 나서는, 그야말로 '축잘알(축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날 오후 8시 시간당 100㎜ 이상의 '몰폭탄'이 쏟아져 일대가 마비된 서울 구로구. 상가 건물에 위치한 10평 남짓의 FC리치축구클럽 연습장을 꽉 채운 건 12명의 여성 회원들이었다. 등 번호와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유니폼은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그렇다고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다. 실력으로 꽉 찬 내공이 발산됐다.
그 이유는 이렇다. '탈(脫)압박' '순두부 터치' '논스톱 패스' '불꽃 슛'이 이곳에도 있다. 프로급 선수들만 가능할 것 같은 축구 기술이 직장인 여성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다니. 동호회에선 개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없으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방영된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인기도 한몫했지만, 현재는 그 거품이 빠지고 진정으로 축구를 온몸으로 즐기는 이들만 모인 셈이다.
축구 실력을 키우기 위해 직장 여성들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실력 있는 지도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선출(선수 출신)' 감독을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프로 축구선수 출신인 최윤호(30) 감독은 이곳에서 여성 회원들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며 기술을 가르친다. 150여 명의 유소년팀을 8년째 지도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부터 직장인 여성들의 문의와 상담이 늘자, 지난해 12월부터 아예 직장인 여성반을 개설했다.
그렇게 개설한 직장인 여성반은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다. 8개월이 지난 현재 80여 명의 회원들이 레슨을 받고 있다. 최 감독은 "40대 어머니반의 경우 현재 대기해야 할 만큼 관심이 뜨겁다"면서 "여성분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끈기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물어보고, 잘 안 되는 기술은 될 때까지 해보려 한다는 것이다. 과연 직장인 여성반이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 우려했던 그로서는 최근 회원이 더 늘면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이날도 최 감독은 드리블과 패스, 슈팅 기술에 이어 페이크 동작까지 지도했다. 모두 실제 경기를 위한 코치였다.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수업은 꽤나 알찼다. "양발 드리블을 해보실 거예요. 양발을 이용해 인사이드로 두 번씩 드리블을 하시는데, 볼이 높으면 안 돼요. 낮게 차세요. 공의 윗부분말고 아랫부분을 차세요."
여성 회원들은 한 명씩 최 감독의 구령에 맞춰 드리블 연습을 했다. 그들은 "쉬워 보이는데 무척 어렵다"는 최 감독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척척 해냈다. 그러자 "오~ 굿! 좋아요!"라는 최 감독의 추임새가 나왔다. 일명 '시저스 페이크 드리블'도 배웠다. 빠른 속도로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다가 한쪽 발을 공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속임 동작이다. 최 감독은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다가 한쪽 발로 공을 차지 않고 속이는 거다"라며 "이때 발이 높으면 안 된다. 상대를 칠 수 있으니까"라고 설명했다. 실제 경기에서 활용하라는 얘기다.
슈팅 훈련도 빠지지 않았다. 양쪽으로 반씩 나눠 선 회원들은 한 명씩 나와 반대편 회원에게 공을 받고 인사이드로 킥을 날렸다. 이때 몸 방향을 사선으로 해서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받아 왼발 앞에 두는 것이다. 곧바로 왼발로 킥을 하면 끝. 최 감독은 회원들에게 "공을 주거나 받을 때 서로 말을 하라"면서 "서로 콜을 해줘야 실제 경기에서 이 기술을 써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강한 '불꽃 슛' 훈련도 했다. 공을 앞으로 살짝 툭 찬 뒤 골대를 향해 대각선 방향으로 힘껏 때리는 거다. "펑!" "펑!" "펑!" 회원들이 힘차게 공을 차는 소리가 연습장을 울렸다. 하지만 제멋대로 차면 공이 골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최 감독은 "발등을 쭉 펴고 엄지발가락 쪽으로 공을 차야 원하는 곳에 강한 슈팅을 할 수 있다"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헉! 헉!" 그렇게 1시간 이상 훈련을 마친 회원들은 거친 숨소리를 내뿜었다. 최 감독은 곧바로 4대 4 미니 게임을 준비했고, 늘 그래 왔는지 회원들은 군말 없이 팀별 조끼를 받아 들었다. 이들은 이날 배운 기술을 토대로 30분가량 경기를 펼쳤다. 비좁은 공간에서도 공격과 수비 태세를 갖춰 진지하게 싸웠다. 골대 앞에서 1대 1 패스로 골을 주고받거나 중거리슛을 날리는 모습은 축구 국가대표 선수 저리 가라였다.
회원들의 수준이 남달라 보였다. 최 감독은 "이곳에 오시는 여성 회원들 중에는 축구 동호회에서 활동하다가 기본적인 기술을 보강하고 싶어 오신 분들도 있다"면서 "축구 보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직접 와서 해보고 싶어 하신다. 지금은 여성 축구의 활성화가 꽤 진행된 듯하다"고 전했다.
"40대도 동호회서 공격수...쉬는 날 공원서 드리블 연습도"
사실 이곳 축구 교실은 탈의실이 없다.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공간조차 없어서 회원들은 상가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서 유니폼으로 환복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변한나씨는 이를 두고 "배우는 즐거움이 훨씬 커서"라고 말한다. 그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 이곳을 찾는다. "운동하는 날이면 항상 뭔가에 들떠있다"는 그. 예전엔 미처 축구의 즐거움을 몰랐다. 변씨는 수영과 스키를 즐겼지만 공이 무서워 구기 종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손흥민(토트넘 홋스퍼·31)이 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등 해외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의 스포츠 일상은 180도 달라졌다. 주 2회 축구 기술을 배우고, 주 2회는 축구를 하며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운동이 운동을 부른 셈이다.
변씨는 축구를 하면서 다른 스포츠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회원들끼리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 배구, 농구, 볼링 등 다른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로 꽃피운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야구 이야기를 하다 "스크린 야구장에 가보자"는 말이 나왔고 실제로 야구 게임도 했다고. 변씨는 "저의 관심이 다른 스포츠로 확장되는 게 신기할 정도"라며 "초등학교 시절 왜 운동장에 나가 축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날 훈련에 참여한 김선화(40)씨와 김채운(22)씨도 '축구에 진심'인 여성들이다. 국제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김선화씨는 손흥민뿐만 아니라 이강인(마요르카·22) 등의 활약을 눈여겨보는 축구 팬이다. 사실 어릴 적부터 축구와 연인이 깊었다. 수원삼성블루윙스 서포터를 했는데 당시 활약했던 이동국을 응원하던 소녀였다. 축구는 김씨의 성장기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그는 축구 기술을 배운 지 두 달 차가 됐다. 사실 '골때녀'를 보며 "나도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직접 해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단다. 하지만 40대라는 나이에 섣불리 축구를 배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축구 레슨을 받을지 반년 정도 고민했다. 배워 보기로 마음먹은 뒤에는 "한 달만 해보고 힘들면 그만두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축구를 배우러 오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들한테는 퇴근 후 축구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지만 "오히려 운동하고 나서 더 활력이 생겼다"며 "집에 가면 휴대폰을 보며 계속 누워 있으니 몸이 항상 처져 있었다"고 했다.
김선화씨는 지난해 10월부터 30여 명의 직장인 여성들로 구성된 축구 동호회에서 공격수를 맡고 있다. 처음엔 5명뿐이었지만 점차 늘어났다. 다른 팀과 경기를 할 때마다 기본기를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이곳 축구 교실을 찾은 이유다. 동호회 회원들도 각자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내돈내산' 축구 레슨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김선화씨는 미니 게임에서도 상대를 따돌리는 빠른 패스와 드리블로 눈길을 끌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동호회에서 경기를 해본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주말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집 앞 공원에서 드리블 연습을 한다고. 그는 "조금 후회되는 게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축구를 했더라면 몸에 더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축구 기술을 배운 지 2주 됐다는 김채운씨. 그도 여성 축구 동호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축구 마니아다. 광주 출신인 그는 직장인 여성들이 주축이 된 축구 동호회에 들어가 활동했다고. "광주에는 아직 축구를 하는 여성 분들이 많지 않다"면서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보니 여자 축구가 이렇게까지 활성화돼 있을 줄 몰라 놀랐다"고 말했다. 많은 직장 여성들이 퇴근 후 축구 기술을 배우러 오는 모습이 신기했단다.
김채운씨는 사실 자칭 'K리그 전도사'다. 어릴 때부터 축구의 매력에 푹 빠졌고, 현재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 K리그 '직관(직접 관람)' 영상을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 중이다. 그가 축구에 빠진 건 2006년 독일월드컵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머리카락을 하얗게 탈색한 이천수가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에 반해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7살이었다. 어린 꼬마는 부모님께 축구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지만 어림없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던 꿈은 그렇게 좌절됐다.
하지만 김채운씨의 '축구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현재 서울이랜드FC의 대학생 마케터로 발탁돼 올 한 해 동안 서울에서 직장인처럼 생활하고 있다. 비록 축구선수는 못 됐지만 대신 K리그를 널리 알리겠다는 꿈을 품게 됐다고 한다. 그의 꿈은 프로축구 '구단 프런트'다. 구단 운영을 위한 홍보 마케팅, 선수 관리 및 팬들과의 소통 등 경기 지원은 물론 행정 업무까지 도맡아 하는 살림꾼 역할이다.
그가 축구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경기장 밖이 아닌 그라운드에서 직접 뛰며 선수들의 고충을 알고 싶었다고. "축구를 잘하게 되면 그라운드에서 미드필더를 하고 싶어요. 주목받는 건 공격수지만 경기를 주도하는 건 미드필더니까요. 앞으로 구단 프런트가 되면 K리그 홍보를 주도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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