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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 앞에 선 당신…'선량한' 차별주의자 대신 동반자 되기

입력
2022.08.13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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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차별의 고통을 호소하는 건, 당신을 믿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2016년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시민들이 강남역 살인사건 희생자 추모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시민들이 강남역 살인사건 희생자 추모 메시지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난히 이상하거나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종종 "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을 하게 됐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하긴, 나부터도 이 영역에 남성으로 보이는 이들이 별로 없다 보니 비슷한 존재를 마주할 때면 궁금한 마음이 먼저 들곤 해서 이 문제에 관심 갖게 된 계기 같은 것을 묻고는 한다. 그런 차원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이 활동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016년 발생한 이 사건은 동시대 수많은 여성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대학생이던 당시, 친구들 손에 이끌려 간 나도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현장 앞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 만무하다. 안타까운 마음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왜 '여성혐오'인지, 수많은 여성들이 왜 그토록 분노하는지 알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분노하는 이들 곁에서 어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당혹스러운 마음과 괜한 불편함을 느꼈다.

불편함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주변 많은 이성 연인이 이 무렵 크고 작은 갈등에 이별을 겪기도 했다. 곁에서 양측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디테일은 다르지만 패턴은 대체로 유사했다. 여성 연인이 일상에서 불편하고 차별적인 경험을 호소하면, 남성 연인은 우물쭈물하거나 도리어 "우리나라가 얼마나 치안이 좋고 평등한데!" 하며 상대를 꾸짖어 갈등이 시작되는 식이었다. 여성은 애인이 자신의 문제에 공감해 주지 못해서, 남성은 왜 '굳이'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지 몰라서, 자신을 다른 남성과 마찬가지로 파렴치한 취급하는 것 같아서 서로 섭섭해하며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이런 현상은 교실에서도 발생한다. 학교 성폭력 예방교육은 성별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나뉜다. 대부분 여성 청소년은 교육 내용에 깊이 공감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다. 어릴 때부터 성과 관련한 문제에 조심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테고 각종 뉴스에서 여성 대상 폭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에 성폭력을 자신의 문제로 체화해서 받아들인다. 반면, 남자 청소년들은 이런 문제에서 한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대체로 무관심하다. 아니, 무관심하다는 표현은 온건하고 대개 부정적이다. 교육이 시작되기 전부터 팔짱을 끼고 저항할 준비를 하거나 아니면 냅다 엎드려 자는 것으로 무관심함을 적극 표현한다. 간혹 이야기를 듣는 몇몇 남자 청소년도 구체적인 폭력 사례가 나오면 고개를 떨구거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곤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 번은 남자 청소년들에게 그간 교육이 어땠는지, 무엇이 불편한지 물었다. 이내 한 청소년은 성폭력 예방교육이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실제 남성들 사이에서 이런 반응이 적지않게 나온다. 다만 의아한 것은, 해당 교육에서는 그런 불만을 우려해 '여자', '남자'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이건 내 교육만이 아니라, 폭력예방교육 전반에서 지향하는 바이다. 특정 성별을 부각하며 남성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해당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에도 부합하지 않기에 지양한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잠재적 가해자 취급'이라는 말이 그토록 반복되어서 나올까?

여성의 말을 외면하는 사람들

사실 '잠재적 가해자 취급'이라는 말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어색하고 이상하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고 있기에 집을 나서며 문단속을 하고,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걸며, 경찰에 치안을 맡긴다. 다른 사회문제, 예컨대 장애 인권이나 인종차별을 이야기할 때, 비장애인이나 백인이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두고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고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유난히 성차별, 성폭력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잠재적 가해자 취급'이라는 구호가 반복되어서 나올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혐오'는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어로 단순히 여성을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이미지의 존재로 편견을 갖거나 남자보다 하등한 존재로 여기는 모든 생각을 의미한다. 여성혐오는 너무나 뿌리 깊고 만연하여 내가 아무리 여성을 좋아해도, 여성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도, 심지어 본인이 여성이어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배우고, 여성을 '보호'하고 '돕는' 만화·영화를 보고, 운전하는 여성을 '김 여사'로, 게임하는 여성을 '혜지'로, 각종 범죄 피해자를 'XX녀'로 언급하며 낙인찍고 대상화해 온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의도치 않아도 우리 무의식에 깊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여성혐오는 여성이 말해도 목소리를 듣지 않는 현실로 나타난다.

작가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책 표지. 창비 제공

작가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책 표지. 창비 제공

리베카 솔닛은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여성의 말이 무시되는 문제를 꼬집었다. 책에는 '맨스플레인(mansplain)'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맨스플레인은 '남성(man)'과 '설명(explain)'을 합친 표현으로 여성이 으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여성의 말을 신뢰하지 않으며 가르치려드는 태도를 꼬집는다. 실로 같은 목소리를 내도 여성의 목소리는 덜 주목받는다. 단적으로 '이대남'을 둘러싼 소란이 그렇다. 그간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성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광장에서 목소리 높이며 불법촬영 시청 가해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 스토킹, 온라인 그루밍,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문제를 드러낸 여성들이 있었음에도 정치권과 미디어는 '이대녀'보다 '이대남'을 먼저 소환했다.

같은 맥락으로 수많은 여성이 성차별·성폭력을 심각하고 시급한 사회구조 문제라고 지적해도 여성혐오적 사고가 지배적인 세상은 이 목소리를 엄살, 예민 정도로 취급하며 외면한다. 사회구조 문제를 그저 불운하고 불가피한 일로 취급하며 여성 개인에게 밤늦은 시간 다니지 말고 조신할 것을, 투덜거리지 말고 더 '노오~력'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야 자신에게도 이 문제에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외면하고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는 이 엉뚱한 반응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내민 손을 뿌리치는 의도적인 외면이며, 동시에 이 문제가 자신에게도 일말의 역할과 책임이 있음을 은연 중 느끼고 있다는 자기고백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대신 '성평등 동반자' 되기

"위선은 악이 선에게 보내는 경배"라는 말을 좋아한다.

냉소와 악행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선량한 태도, 행동은 선량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장애인을 차별하겠다고 의도하지 않아도, 비장애인 중심으로 굴러가는 세상은 엘리베이터 앞에 '무심코' 계단을 만든다. 이렇게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선량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아닌 숨겨진 차별을 발견하고 그에 맞서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불편함은 그 행동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성차별·성폭력 문제 앞에서 가해자, 방관자, 아니 그 비슷한 무엇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은, 결백하고 싶은 마음, 우리에게는 '동반자'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공명하여 피해자를 탓해서는 안 됨을, 성폭력 문제가 시급하고 일상적인 여성의 문제임을 알게 했다. 이처럼 불편함을 안고 문제를 바라볼 때, 동반자로서의 변화는 시작된다.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인 2017년 5월 17일 추모 문화제에 참석한 남녀 시민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글을 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왕태석 기자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인 2017년 5월 17일 추모 문화제에 참석한 남녀 시민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글을 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왕태석 기자

대단히 영웅적이지 않아도 좋다. 무심코 한 말과 행동이 무의식 중에 보고 배운 차별적 구조의 영향일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하나씩 바꿔가자.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외면 말고 "요새 그런 말 하면 큰일 나요"라고 한 마디 얹으며 주변을 안전하게 만든다든가, 불편함을 호소하는 친구와 연대하며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가슴 구석을 찌르는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불편함을 호소한다면, 그건 당신이 변화 가능한 사람임을 믿고 함께 성평등 동반자로 나아가자는 제안일 것이다. (애당초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는다) 그 손을 잡는 일, 변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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