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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키스트(러시아 정보원)의 두 갈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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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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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콥툰(Dmitry Kovtun, 1965.9.25~2022.6.4)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한 전직 KGB 요원 리트비넨코를 방사능 독극물 '폴로늄 210''으로 독살한 혐의로 영국 검찰에 의해 기소된 피의자 중 한 명인 전직 KGB요원 드미트리 콥툰. 엘리트 정보장교였던 그는 KGB 해체 후 독일로 망명해 방황의 시절을 겪고 러시아로 돌아가 사업가로 일하며 KGB 후신인 FSB를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러시아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낸 콥툰. AP 연합뉴스

푸틴의 러시아를 ‘마피아 국가’라 부르는 까닭은 푸틴을 정점으로 한 소수의 권력집단이, 마피아 패밀리처럼, 범죄를 통해 이권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 이권을 지키고, 거스르는 이들을 배제하는 기준이 법이 아니라 총과 돈의 이해, 민주주의적 다수의 윤리가 아니라 총과 돈을 쥔 이들의 윤리에 따르기 때문이다. 마피아와 다른 점은 그들을 규제-제어할 수 있는 상위 권력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맑시즘 국가론을 맹신하며, 마피아 국가와 정상국가를 구분하는 것 자체에 냉소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러시아는 근대국가의 원론적인, 법적-윤리적 허울조차 벗어던졌다는 점에서 소위 문제 많은 여느 정상국가와도 다르다.

1999년 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이듬해 5월 대권을 쥔 푸틴은 2차례 연임 후 자신의 수족인 메드베데프(2008~12 재임)를 징검다리 삼아 헌법의 세 차례 연임 금지 조항을 우회, 2012년과 18년 4차례 임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2020년 6월 헌법을 고쳐 대통령 기존 재임 횟수를 ‘제로’로 리셋함으로써, 만 83세 되는 2036년까지 권력 독점의 가도를 닦았다.
그 20여 년 사이 그는 천연자원과 에너지, 금융, 통신 등 국가적 핵심 이권사업들을 장악했고 정적 등을 숱하게 투옥하고 살해했다. 그리고 2020년 12월, 대통령과 일가에게 법으로 영구적인 형사면책권을 부여, 퇴임 이후 어떠한 혐의로도 형사 고소 고발되거나 조사-심문-체포-구금 당할 위험까지 제거했다. 무심결에 한 말이겠지만 푸틴은 스스로를 “나는 유럽이 아닌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레터에서 상술)

이제 그가 두려워 하는 것은, 질병과 수명을 빼면, 봉기(혁명)와 쿠데타 뿐이다. 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장교 출신인 그가 권력 장악 과정서부터 지금까지 ‘실로비키(Siloviki, 제복의 남자들)’ 즉 군과 정보기관 출신 수족들을 권력기관과 재계 요직에 배치해 자신을 정점으로 한 겹겹의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의 누수를 막는답시고 자행해온 암살 등 범죄는 외부 세계로 하여금 푸틴 권력의 전모를 보게 한 균열이었다. 러시아 바깥 세계 시민들은 그 엽기적 범죄들을 통해, 전향한 KGB 요원의 폭로나 그 어떤 러시아 전문가의 설명보다 선연하게, 푸틴(권력)의 실체를 보아 왔다.

영국 외무부 비밀정보부(MI6)를 돕던 전직 KGB요원 알렉산더 리트비넨코(Alexander Litvinenko)의 2006년 암살은, ‘초소형 핵폭탄’이라 불린 방사능 독극물을 동원한 테러여서 세상을 또 한번 경악케 했다. 구 소비에트 내무부와 KGB를 거쳐 90년대 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에서 푸틴의 부하로도 일했던 리트비넨코는 98년 러시아 미디어 재벌이자 하원의원이던 보리스 베레좁스키(2013년 의문사)에 대한 푸틴의 암살 음모를 폭로한 뒤 2000년 영국으로 망명, MI6의 러시아 조직범죄 전문가로 활동한 인물. 리트비넨코는 ‘블로잉 업 러시아: 내부의 테러’ 등 책과 인터뷰를 통해 푸틴 정부가 체첸 반군의 소행이라 밝힌 99년 모스크바 인근 아파트 단지 연쇄 폭탄테러가 사실은 자작극, 즉 푸틴의 지시에 의한 FSB의 공작이었다고 주장했다. 8월 31일부터 5차례 이어진 그 테러로 모스크바 시민 300여 명이 숨졌고, 푸틴은 그걸 빌미로 체첸과의 2차전쟁을 시작했다.

리트비넨코는 2006년 11월 런던의 한 고급호텔 바에서 전부터 알고 지낸 KGB요원 출신 ‘사업가’ 둘을 만나 차를 마신 뒤 그날 밤부터 극심한 구토와 복통, 탈모 등 전형적인 방사능 피폭 증상에 시달리다 23일 만에 숨졌다. 원인 물질은 "시안화수소보다 치사율이 2,500억 배나 높다"는 방사능 독극물 ‘폴로늄 210’이었다. 경찰은 그가 쓴 찻주전자에서 무려 10만 베크렐(1㎠당)에 달하는 방사능을 검출했다. 바 종업원 등 7명도 피폭 증상을 겪었다.
당시 리트비넨코는 러시아 기자 안나 폴릿콥프스카야(1958~2006)의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진보 매체 ‘노바야 가제타’ 기자로서 체첸 전쟁의 실상 등 푸틴 권력의 범죄-비리 탐사보도로 러시아 국내에서 명성을 날린 폴릿콥스카야는 약 한 달 전 모스크바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살인청부업자의 총에 맞아 숨졌다. 범인 등 관련자 5명이 체포돼 종신형 등 중형을 선고 받았지만, 청부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리트비넨코는 숨을 거두기 직전 병상에서 이런 구술 유언을 남겼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몇 마디 할 때가 온 것 같다.(…) 당신은 인간의 목숨과 자유, 문명의 가치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푸틴 씨! 당신은 한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저항의 소리가 당신이 죽는 날까지 귓가에 시끄럽게 울릴 것이다.”(‘푸틴의 러시아’ 대릴 커닝엄 지음, 장선하 옮김)

푸틴이 집권한 2000년 영국으로 망명, 영국 정보부를 도우며 푸틴의 권력 범죄를 폭로한 전직 KGB요원 알렉세이 리트비넨코의 건강한 모습(왼쪽)과 방사능 독극물 '폴로늄 210'에 중독돼 숨지던 무렵의 그. khpg.org 사진.

영국 검찰은 리트비넨코가 만난 두 ‘사업가’ 안드레이 루고보이(Andrei Lugovoi, 1966~)와 드미트리 콥툰(Dmitry Kovtun, 1965.9.25~2022.6.4)을 범인으로 기소했다.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이끈 당시 고등법원 판사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러시아 정부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게 모든 정황증거를 통해 강력하게 뒷받침됐다”며 “FSB는 작전을 벌이기 전 (푸틴의) 승인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고보이가 모스크바발 런던행 비행기를 통해 독극물을 반입한 사실, 극소수 권력자 만이 방사능 독극물의 처분 권한을 지닌다는 사실 등이 근거였다.
커닝엄은 책에, 폴로늄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며 범인들도 자신들이 사용한 독극물의 실체를 몰랐으리라고 썼다. 루고보이와 콥툰은 모스크바로 돌아간 직후 방사능 피폭 증상으로 입원했지만, 범행 사실은 부인했고 러시아 정부도 그들의 인도를 거부했다. 2021년 유럽인권법원는 러시아 정부에 대해 범죄 책임을 물으며, 리트비넨코의 유족에게 비금전적 손실에 대한 보상금 10만 유로를 지급하라는, 공허한 판결을 내렸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 KGB 즉 구소련 정보-치안 권력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고삐 풀린 언론과 노동쟁의, 생필품난에 항의하는 시민 폭동 등 모든 변화가 KGB에겐 1917년 혁명 이후 처음 겪는 위협이고 공포였다. KGB는 혼란을 방지-수습해야 하는 책임을 진 동시에 ‘소련 국민의 헌법상의 권리와 정당한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의 ‘사회주의적 합법성’까지 준수해야 했다. 손발이 묶인 ‘질서-체제의 수호자’들은 언론에 의해 ‘척결돼야 할 구체제의 상징’으로 손가락질까지 당했다. ‘체키스트(레닌이 설립한 비밀경찰 ‘체카’에서 유래된 구소련 정보원의 통칭)’의 자존심과 엘리트의식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고, 배급제 시스템 하에서 활동비는커녕 급여조차 제때 지급받지 못하는 처지에 몰렸다. 실패로 끝난 91년 8월 쿠데타의 주역도 그들이었다. 그해 말 보리스 옐친이 집권했고, 소비에트가 공식 해체됐고, KGB도 지역과 직능에 따라 여러 조직으로 쪼개지며 사실상 해체됐다. 수많은 정예 요원들이 서방 세계로 망명하거나 러시아의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들의 사설 경호원 등으로 변신했다. 푸틴이 최근 러시아 국영통신사 ‘리아 노보스티’ 인터뷰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몰래 택시를 몰아야 했다”고 말했던 게 그 무렵이었고, 루고보이와 콥툰이 새 삶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푸틴과 조지아 전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오른쪽). 리트비넨코 독살사건 직후인 2006년 런던을 방문할 예정이던 사카슈빌리에게 당시 벨라루스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푸틴과 셋이서 연회를 즐기던 자리에서 "푸틴의 음식이 가장 안전한 음식이니 여기선 맘껏 드시라"고 농담했다가 푸틴이 포크를 집어던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2018년 가디언 보도). 위키피디아.

모스크바고등군사학교를 나란히 졸업한 둘은 80년대 KGB 제9국(요인 경호)에서도 함께 근무한 엘리트 정보장교였다. 소비에트 해체 후 루고보이는 신설 FSB에서 얼마간 요인경호 업무를 지속하다 96년 은퇴, 개인 경호업체를 차려 사업가로 성공했다. 반면 콥툰은 독일인 아내 이나 호네(Inna Hohne)와 함께 독일로 망명, 함부르크에 정착해 웨이터 등으로 일하며 과거와 등졌다. 호네는 훗날 경찰조사에서 “함께 사는 동안 콥툰은 폭음을 일삼았고. 포르노 배우로 출세하려던 꿈을 꾸곤 했다”고 말했다. 콥툰은 이혼 후 러시아로 되돌아가 이런저런 시원찮은 사업을 벌였지만, 썩 성공하진 못했다. 둘은 무명이었다.

체키스트의 암살 관행은 19세기 말 차르의 비밀경찰 ‘오흐라나(Okhrana, 공안질서수호국)’ 시절부터 악명을 떨쳤다. 오흐라나의 주요 타깃은 볼셰비키와 좌파 노동조합이었다. 1917년 혁명 직후 레닌은 ‘체카(Cheka, 반혁명저지 국가특수위원회)’를 설립해 저 전통을 계승했고, 18년 암살 미수사건을 겪은 뒤 체카를 앞세워 대대적인 ‘적색 테러’를 감행했다. 구 소련 해체 전까지 모스크바 KGB 본부 앞뜰에 동상으로 서 있던 체카 원년 지도자 펠릭스 제르진스키(Felix Dzerzhinsky, 1877~1926)는 “누구든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루머를 퍼뜨리는 자는 아무리 사소한 소문이라 하더라도 즉각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추방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추방은 상대적으로 자비로운 조치였고, 고문과 살인, 혁명재판소를 통한 처형이 비일비재했다. 체카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희생된 이들만, 알려진 바 약 10만 명에 달했다. 체카는 국가정치부(GPU), 내무인민위원회(NKVD) 등으로 이름과 직제를 바꾸며 이어지다 54년 KGB로 저 유구한 바통을 넘겼다. 공안 질서의 파수꾼이자 체제 수호의 전위로서 체키스트는, 나치 친위대에 맞먹는 엘리트 권력집단으로 대접 받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당시 중령 푸틴은 동독 드레스덴에 주재한 KGB 해외첩보부 소속 15년차 요원이었다. 그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와의 연락관으로서 고정 첩보원 관리와 서방 유력자 포섭 임무를 함께 수행했다. 장벽 붕괴 후 그는 동독 시민들이 슈타지 본부 건물을 점거해 집기를 부수고 방화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시위대가 KGB 요원 거주지까지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푸틴은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모스크바는 침묵”했다. 그는 비무장 상태로 정복을 차려 입고 혼자 군중 앞에 나서 “이 집은 현재 철통 경비를 받고 있다. 무장한 내 병사들은 누구든 건물 안에 진입하는 이에게 가차없이 발포하라는 내 명령을 받은 상태다”라고 유창하고도 침착한 독일어로 위협함으로써 시위대를 물리쳤다고 한다. 푸틴이 자랑처럼 입에 달고 산다는, 스티븐 리 마이어스가 쓴 푸틴 전기 ‘The New Tsar(2015)’에 소개된 저 일화를, 전문가들은 푸틴의 궁극적 이상 혹은 그 이상의 화신으로서의 자신을 집약적으로 대변하는 에피소드로 흔히 인용한다고 한다. “조국을 대변하는 존재, 국가 주권의 담지자로서 혼란에 맞서 안정과 질서를 구현하는 존재, 통제되지 않은 감정적 분출에 맞서 단호하고 엄격하게 힘을 과시하는 권위의 화신.”

1936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한 행사 장면. 청년들이 소비에트 상징물과 함께 짊어진 게 '철의 펠릭스(Iron Felix)'라 불린 체카 원년 지도자 펠릭스 드레진스키의 사진이다. 위키피디아.

90년대 초 귀국한 푸틴은 아나톨리 솝차크 레닌그라드 신임 시장의 국제고문 신분으로 자원 수출서류를 위조해 방대한 자금을 빼돌렸고, 그 ‘공로’로 94년 옐친의 대통령 재산관리부 부서장으로, 행정부 제1부부장(98)으로, FSB 국장(98)으로, 국무총리(99)로 승승장구했다. 99년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되던 무렵 그는 이미 체카의 구세주로서 군사-정보분야를 장악한 실세였다. 그리고, 정적과 언론인을 비롯해 옛 보스였던 솝차크까지 암살하는 무자비함으로, 모스크바 아파트 폭탄 테러 등 일련의 정치 공작으로, 이듬해 5월 대통령이 됐다.
그리곤, 옐친의 국유-국영기업 민영화 과정에 알짜기업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언론 금융 가스 등 에너지 통신 분야를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을 탈세 등 다양한 혐의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수족들을 앉혔다.

리트비넨코가 독살의 첫 희생자는 아니었다. 러시아군정보총국(GRU) 출신으로 MI6를 돕던 세르게이 스크리팔은 2018년 딸과 함께 영국 솔즈베리의 한 공원 벤치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됐다. 경찰은 그의 집 대문 손잡이에서 다량의 군사용 신경작용제 노비초크(Novichok)를 검출해냈다. 푸틴의 전 보스 솝차크는 2000년 한 호텔에서 침실 스탠드 전구에 발린 독극물이 증발하며 발생한 가스에 독살 당했고, 그해 재야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도 속옷에 묻어 있던 노비초크에 중독됐다.

하지만 리트비넨코의 암살은, 심증과 정황증거뿐이던 전례들과 달리, 추적이 가능한 방사능물질을 사용함으로써 굳이 배후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한국의 해병대가 구호처럼 여기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말처럼, 러시아에는 “전직 체키스트란 건 없다”는 말이 있다. 스탈린은 “체키스트에겐 오직 두 갈래 길뿐이다. 승진하거나 감옥에 가거나”라고 했다. 리트비넨코 암살을 통해 푸틴은, '감옥이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목표 제거가 아니라 잠재적 대상을 공포로 위축시키는 데 있다.

루고보이와 콥툰이 언제부터 '전직 체키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FSB에 협력하기 시작했는지도 불분명하다.
2007년 5월 영국 경찰에 의해 먼저 기소된 루고보이는 넉 달 뒤 버젓이 극우민족주의 정당인 자유민주당 후보로 하원(Duma) 선거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이후 지금까지 현역 의원으로서의 면책 특권을 누리고 있고, 2015년에는 ‘조국에 봉사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
반면 영국 검찰이 2012년에야 공범으로 추가 기소한 콥툰은 러시아에서 민간 보안 컨설턴트 등으로 일한 사실 외 알려진 행적이 거의 없다. 내도록 무명의 존재로 살며, 푸틴의 소모품으로서 단 한 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던 그가 6월 4일 코로나-19 감염증으로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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