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숨값이 931원이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할 줄은 몰랐다. 일제 강점기에 동원돼 강제 노역한 피해자 정신영(92) 할머니가 4일 공개한 통장엔 일본 정부의 '99엔짜리 양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일본연금기구가 지난달 6일 정 할머니에게 후생연금보험 탈퇴 수당으로 송금한 내역(₩931)이 선명했다. 99엔을 한화로 환산한 값이었다. 정 할머니는 1944년 5월 만 14세의 나이로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못 이겨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끌려간 뒤 18개월간 고초를 겪었지만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애들 과자값도 못한 돈을 줬다." 야윈 몸을 의자에 파묻고 있던 정 할머니는 모욕감에 몸을 떨었고,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눈물을 삼키며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정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사과도 않고 어찌 그럴 수 있냐. 할머니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이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99엔을 지급하자 피해 당사자와 피해자 지원단체가 "일본 정부가 또다시 99엔짜리 양심을 드러냈다"고 강력 규탄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이날 오후 광주광역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정 할머니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무릎 꿇고 백번 사죄해도 부족할 판에, 일본 정부는 90대 피해 할머니들에게 껌 한 통 값도 안되는 돈을 지급해 또 한번 피해자들을 우롱했다"며 "악의적인 모욕 이외엔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고 비난했다. 이어 "후생 연금 탈퇴 수당은 77년 전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한국으로 귀환할 때 지급됐어야 한다"며 "그러나 일본 정부는 후생 연금의 존재조차 피해자들에게 감춰왔고, 마지못해 수당을 지급하면서 77년 전 액면가 그대로 지급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9년과 2014년에도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대리인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 99엔과 199엔을 각각 지급해 공분을 산 바 있다.
시민모임은 윤석열 정부를 직격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이 피해자를 모독하고 무시하는 데에는 우리 정부의 태도도 한몫하고 있다"며 "한일 관계 복원을 구실로 일본에 한없이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방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것을 두고 "해결 방안은 가해국과 가해 기업이 내놓아야 할 일"이라고 꼬집었다.
외교부가 일본 기업 국내 자산 현금화(강제 매각) 사건을 맡은 대법원 재판부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에 대해서도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노골적인 방해 행위"라며 "결국 일본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는 피해자를 희생양 삼아 한일 관계 복원을 구걸할 때가 아니다"며 "사죄 한마디 듣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는 양금덕 할머니의 간절함에 우선 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