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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살인' 그린 작가, 공포소설처럼 묘연하게 죽었다

입력
2022.08.05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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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에드거 앨런 포의 미스터리한 죽음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 포 기념관 홈페이지

에드거 앨런 포. 포 기념관 홈페이지

1849년 9월 28일 미국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의 항구.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미끄러져 들어온 증기선에서 눈 밑에 깊은 그늘이 진 갈색 곱슬머리의 한 신사가 내렸다. 다소 낡은 블랙 슈트와 나비넥타이 차림에다 한쪽 가슴에는 부토니에르 장식을 꽂은 채였을 것이다. 한 손에는 등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증기선에서 내린 신사는 이내 거리의 인파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신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닷새 후인 10월 3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볼티모어 시내 한 선술집 앞에서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중얼거리며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쓰러진 신사는 증기선에서 내릴 때와 달리 행색이 초라했다. 싸구려 야자수잎으로 만든 모자와 때묻은 누더기 차림에도 지팡이만은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이보세요! 정신이 드세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지역 일간 볼티모어 선에서 조판공으로 일하는 조셉 워커가 쓰러진 신사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남자는 더듬더듬 조셉 에반스 스노드그래스의 이름을 일러줬고, 워커는 스노드그래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에드거 앨런 포라는 이름의 신사가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긴급히 당신의 도움을 청합니다. 서둘러 주세요.'

볼티모어 선술집 앞에서 정신착란 상태로 발견된 신사는 바로 '추리소설의 창시자', '공포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드거 앨런 포. 볼티모어는 심지어 연고도 없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포는 나흘 뒤 숨을 거뒀다. 입원 직전 5일간의 행적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밀실 살인에서처럼 포는 죽음의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포 기념관에 따르면, 그의 사인으로 제기된 가설만 최소 26개. "우리는 포가 왜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에드거 앨런 포 협회의 비서 제프리 사보이)


에드거 앨런 포의 죽기 전 마지막 묘연했던 5일간 행적을 추적하는 영화 '더 레이븐'의 한 장면. 배우 존 쿠삭이 포를 연기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죽기 전 마지막 묘연했던 5일간 행적을 추적하는 영화 '더 레이븐'의 한 장면. 배우 존 쿠삭이 포를 연기했다.


술독에 빠진 미스터리… 알코올 중독?

포의 죽음은 그가 쓴 아무 소설이나 펼치고 한 페이지를 찢어낸 것처럼 의문투성이였다. 포의 사망증명서에 기록된 사인은 '뇌염(phrenitis)'이다. 고열, 발작, 정신착란 등 증상은 뇌염으로 추정 가능하지만 그의 죽음 전모를 밝히기엔 역부족이다. 사인을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우면 뇌염으로 몰아가던 시기였다.

사인을 둘러싼 각종 추론이 난무하지만 지금까지는 알코올중독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주변 지인들조차 포가 술에 취해 죽었다고 확신했다. 포의 절친 케네디는 당시 "볼티모어에서 우연히 동료를 만난 포가 술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고, 그 결과 정신착란과 발열 등을 일으키며 커리어를 마감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친구의 증언과 달리 포가 술에 약한 체질이었다는 반론도 남아 있다. 포 기념관 큐레이터인 크리스토퍼 젬트너는 "포는 와인 한 잔을 마신 후에도 비틀거리며 취했다. 여동생도 그랬던 만큼 유전적인 것 같다"고 회고했다.

애초 포의 죽음에 술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사람은 의식을 잃은 포를 병원으로 옮긴 스노드그래스다. 금주운동의 일원이었던 스노드그래스가 전국 순회 강연에서 포의 죽음을 폭음 탓으로 돌리면서다. 그는 포의 마지막 순간도 "술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했다. 포의 라이벌이었던 루퍼스 그리스월드 역시 1850년 회고록을 쓰면서 포가 술꾼이었다는 악의적 내용을 담았다. 한번 왜곡된 포의 평판은 회복되지 못한 채 한 세기 이상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말았다.


70년 가까이 매년 포의 생일인 1월 19일이면 포의 묘지에 장미와 코냑을 두고 가는 신원 미상의 방문객이 있었으나 2010년부터 발길이 끊겼다. 그를 대신한 포의 팬들이 2011년 1월 19일 포의 묘지에 장미 여러 송이를 놓았다. 볼티모어=AP

70년 가까이 매년 포의 생일인 1월 19일이면 포의 묘지에 장미와 코냑을 두고 가는 신원 미상의 방문객이 있었으나 2010년부터 발길이 끊겼다. 그를 대신한 포의 팬들이 2011년 1월 19일 포의 묘지에 장미 여러 송이를 놓았다. 볼티모어=AP

포의 죽음을 둘러싼 가설만 최소 26개

하지만 포가 술독에 빠져 숨졌다는 가설은 무엇보다 부랑자나 다름없던 그의 마지막 행색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 포는 거적때기 같은 남의 옷을 입고 있었던 걸까. 정황 증거로는 당대 횡행했던 '유권자 바꿔치기' 수법의 선거 사기(쿠핑·Cooping)가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포가 쿠핑의 희생양이 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 대부분 주요 도시에서 그랬듯 볼티모어에서도 부정선거가 만연했다. 부정선거에는 당연히 갱단이 개입했다. 갱단이 도시 곳곳에서 취객이나 노숙자를 모집한 뒤 이들을 '유령 선거인'으로 둔갑시켜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수법이 바로 쿠핑이다. 갱단은 모집한 노숙자나 취객을 선거 직전까지 지하실에 감금한 채 술과 음식을 제공하며 관리했다고 한다. 심지어 취객과 노숙자들은 투표 당일 옷을 몇 차례씩 갈아입어 가면서 반복적으로 투표에 동원됐다. 당시만 해도 유권자 명단이 따로 없고, 비밀투표가 불가능할 정도로 선거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령 선거인들은 부정선거에 동원된 뒤 약과 술에 취한 채 길거리에 방치됐고, 사망하는 일도 빈번했다. 마침 포가 빗속에서 발견된 10월 3일은 하원의원 선거일이었고, 근처 선술집은 투표소였다.


포의 친구이자 의사인 스노드그래스가 사망한 포의 머리에서 잘라낸 머리카락. 포 기념관 홈페이지

포의 친구이자 의사인 스노드그래스가 사망한 포의 머리에서 잘라낸 머리카락. 포 기념관 홈페이지

학계에서는 쿠핑이 꽤 설득력 있다고 본다. 1934년 포의 전기를 쓴 허비 앨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이라고 했다. 남북전쟁 이전 볼티모어 정치에 대해 저술한 역사가 진 베이커 역시 동의한다. 포의 이름값에 드리워진 신화가 아닌 좀 더 현실에 닿아 있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이유로 포 애호가들은 쿠핑 가설을 반기지 않는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또 다른 사인의 하나는 광견병이다. 볼티모어병원의 마이클 베니테즈 내과과장은 포의 병원임상기록을 검토한 결과, 그가 기르던 고양이에게 감염된 광견병으로 숨졌다고 주장했다. 광견병 연관성은 1996년 '메릴랜드 메디컬 저널'에도 실렸다. "광견병은 개, 고양이 등에게 물려 전염되며 방치하면 혼수상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 뒤 말끔히 나았다가 4일 만에 사망하게 되는 바이러스 질환"인데 "입원 당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다음날 호전됐다 다시 악화, 사흘 만에 숨진 포의 증세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폐렴으로 발전한 독감 △일산화탄소 중독 △중금속 중독 △뇌종양 △콜레라 △심장병 △간질 △살인 등 그의 사인을 둘러싼 수많은 가설이 존재한다. 포 애호가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사인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볼티모어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기념비. 게티이미지뱅크

볼티모어에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기념비. 게티이미지뱅크


영원히 풀리지 않을 죽음의 미스터리

포의 열렬한 숭배자인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포의 죽음은 거의 자살에 가까웠고, 오랫동안 준비된 자살이었다"고 썼다. 실제 포는 숨지기 약 1년 전 1848년 11월 아편 과다복용으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몸담았던 잡지의 폐간과 아내의 죽음으로 절망했기 때문이다.

불우한 생애 역시 자살설의 한 근거다. 포는 1809년 보스턴에서 배우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집을 나갔고, 2세 때 어머니도 결핵으로 숨졌다. 고아나 마찬가지였던 포는 부유한 담배상 존 앨런 아래서 자랐다. 14세 때 그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고, 사춘기 시절 연모했던 친구 어머니가 역시 결핵으로 숨지는 걸 목격했다. 양부와의 갈등도 커졌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826년 버지니아대에 입학하지만 퇴학당하고 만다. 포 기념관에 따르면 당시 포의 주머니엔 110달러뿐이었다. 등록금의 3분의 1에 불과한 액수였다. 나머지를 충당하기 위해 포는 도박에 빠졌고 이내 2,000달러의 빚을 지게 된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지만 이마저도 불명예 전역하면서 양부와는 절연한다. 여느 대가들처럼 생전의 포는 문학적 재능도 인정받지 못했다.


포의 대표작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은 근대 추리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시공사 제공

포의 대표작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은 근대 추리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시공사 제공

그렇다고 포가 완전히 삶의 끈을 놓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직전에는 유년기를 보냈던 리치먼드에서 어릴 적 연인이었던 사라 엘리마 로이스터 쉘턴과 재회해 결혼까지 약속했다. 시집 편집 건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시인 리온 라우드와도 만나기로 했다. 리치먼드에서 필라델피아를 찍고 뉴욕 집으로 가는 여정이 그의 마지막 여행길이었다는 걸 그는 예감했을까. 포는 어떤 연유에선지 볼티모어에서 영영 발이 묶여버렸고 40세 짧은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날 포는 '레이놀즈'라는 이름을 몇 시간이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레이놀즈의 정체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동트기 전 새벽 얕은 숨을 들이쉬던 포는 다섯 마디만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주여, 나의 불쌍한 영혼을 도우소서.(Lord, help my poor soul.)" 심지어 죽으면서도 포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남겼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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