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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의 청출어람

입력
2022.08.0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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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7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당신이 부끄러웠으면 좋겠습니다 : 청소경비노동자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 공동체원들께’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 있다. 뉴스1

7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당신이 부끄러웠으면 좋겠습니다 : 청소경비노동자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 공동체원들께’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 있다. 뉴스1

어려서부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유난히 잘 따르는 학생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절대적인 정언명령이 됐다. 초등학교 때 '음식은 10번 이상 씹고 삼켜라'라고 배운 날에는 가족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도 식탁에 홀로 남아 손가락을 접어 가며 씹은 횟수를 우직하게 셌을 정도다.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으라는 것 외에도 학교는 선생님의 말을 통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이런저런 규칙을 가르쳤고, 이는 고스란히 나라는 인간의 도덕률이 되었다. 물론 늘 준수하긴 어려웠을지라도 나름대로 노력은 해왔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퇴색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학교는 여전히 도덕적인 권위를 지닌 공간이었다. 다니던 대학에서 무인경비 시스템을 도입한다며 경비원을 해고한다고 했을 때 배신감을 느낀 이유다. 같은 학기 철학 교양 수업에서 배운 '다른 사람을 언제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칸트의 말을 채 소화하기도 이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런 가르침을 주던 학교에서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 고령의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내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교뿐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이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청소·경비 업무를 외주화했다. 대학은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고, 업체가 노동자를 고용한다. 자연스레 대학 내 노동조건은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으나 '간접고용'의 방패를 두른 대학 본부는 책임에서 벗어났다. 2010년 홍익대는 청소노동자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용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 이후 대학가에서 해고(계약 해지)에서부터 임금, 노동 환경을 둘러싼 갈등은 되풀이됐다.

최근 연세대의 일부 학생이 교내에서 집회 중인 청소·경비 노동자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노동자들은 시급 약 400원 인상과 샤워실 설치, 정년 퇴직자 인원 충원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었다. 소송을 낸 학생은 소음으로 학습권이 침해됐고, 노동자의 집회가 허가받지 않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젊은 세대의 지나친 능력주의와 공감 부족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비판하지만, '젊은 세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갈등의 한가운데 서 있는 연세대는 "용역업체와 노동자 사이의 일이라 대학과는 관계가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연세대뿐 아니라 고려대, 숙명여대 등에서도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대학 내 노동자들의 투쟁이 지난 3월부터 이어지나 대학 본부는 서로 짠 듯이 묵묵부답이다. 하청인 용역업체는 결국 원청인 학교와 계약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한 채로.

연세대 재학생의 소송은 이런 학교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실천한 결과다. 소송을 낸 당사자는 재학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먹고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노조 활동으로 왜 학생들의 공부가 방해받아야 하나"라고 따져 물었다. 대학 본부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집회를 '우리와는 관련 없다'라고 선을 긋는데 학생이 이를 따라 '우리'의 선 밖으로 청소·경비 노동자를 밀어내는 일은 당연하다. 노동자들의 외침을 모르쇠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적극적인 입막음에 나섰으니, 어찌 보면 일종의 청출어람이 아닌가 싶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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