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로 원유 생산량 줄어드는데
낙농가·정부 '차등가격제' 놓고 갈등
'원유 납품 거부' 사태 일까 조마조마
"대다수 낙농가에서 키우는 홀스타인 젖소는 더위에 약한데, 올여름은 폭염으로 예년보다 원유 생산량이 많이 줄었죠. 9월까지 더운 날씨가 이어지면 공급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유가공업체 관계자)
올여름 우유를 생산하는 유가공 업체의 고심이 깊어졌다. 정부의 '원유 용도별 차등가격제' 시행을 앞두고 낙농가의 반발이 계속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더위에 원유 생산량이 줄어 제품 생산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1일 새 원유 가격 적용 시한이 닥쳤지만 유가공 업계는 낙농가와 이견차로 협상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우유를 시작으로 우유 관련 제품의 가격이 잇따라 오르는 '밀크플레이션'에 대한 걱정이 나오면서 가장 큰 피해는 소비자가 입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무더위에 '원유 수급' 불안…서울우유, 미납 사전고지도
낙농진흥회에 따르면 사룟값 상승과 환경 규제 등에 따른 시설 투자 확대 부담으로 올해 1분기 원유 생산량은 전년 동기 대비 2.5%(49만8,000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분기와 3분기도 각각 3.9%, 4.5% 내외로 생산량이 줄어들 전망이다. 6월 젖소 사육 마릿수는 전년 대비 3.6% 내외로 감소한 38만6,000마리로 올 하반기까지 계속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최근 무더위가 겹치면서 원유 부족 현상이 일 조짐이다. 서울우유협동조합은 최근 유통업체에 원유 공급이 모자라 8월 말까지 제품 미납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서울우유 관계자는 "원유 수급이 불안정해 선제적으로 알린 것"이라며 "날이 더 더워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사육되는 젖소는 대부분 외국 품종인 홀스타인 젖소로 추위에는 비교적 잘 견디지만 더위에 약하다. 2018년 농촌진흥청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홀스타인 젖소는 27도를 넘을 때 사료 섭취량이 4.2% 줄고, 우유 생산량은 21~23도일 때보다 8% 떨어졌다. 매년 여름이면 고온에 젖소가 스트레스를 받아 자연히 원유 생산량이 줄었는데, 올해는 유독 날이 더워 생산량이 예년보다 더 감소할 것이란 우려다.
게다가 낙농가가 정부의 용도별 차등가격제 도입을 반대하며 최후의 수단으로 원유 납품 거부까지 꺼내고 있다. 가뜩이나 원유 생산량이 줄고 있는데, 낙농가에서 원유를 내보내지 않으면 제품 생산 부담은 커지고,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뿐 아니라 빵, 커피 등 우유가 들어가는 식음료까지 줄줄이 가격 인상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나온다.
낙농가, '원유 납품 거부' 카드 꺼낸 이유
이 같은 우려 속에는 새 원윳값 책정 기준을 놓고 정부와 낙농가의 갈등이 얽혀 있다. 정부는 흰 우유를 만드는 음용유와 치즈 등 유제품을 만드는 가공유를 용도에 따라 나누고 가공유 가격을 낮추는 새 제도를 도입하려 하는데, 낙농가는 수익이 크게 줄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기존 방식인 '생산비 연동제'는 낙농가의 원유 납품 물량을 일정 수준 보장하고, 쓰임새와 관계없이 생산비에 따라 원유 가격을 책정했다. 이 경우 우유 소비가 해마다 줄어도 원유 가격은 계속 오르기 때문에 정부는 이 상황을 바꿔보겠다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우유 소비량은 2001년 36.5kg에서 2021년 32kg으로 감소한 반면, 같은 기간 유제품 소비는 63.9kg에서 86.1kg으로 늘었다.
정부안에 따르면 음용유 195만 톤은 L당 1,100원, 가공유 10만 톤은 L당 800원으로 각각 따로 적용한다. 기존엔 용도 구분 없이 모두 L당 1,100원이었으나 새 제도가 시행되면 유제품을 만드는 가공유 가격은 떨어진다.
그러나 낙농가에서는 치솟는 사룟값으로 빚이 늘어나는 마당에 원윳값을 내리면 생산비도 못 건질 것이라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한국낙농육우협회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호당 평균 부채는 39.5% 증가했고, 폐업 농가는 전년 대비 67% 늘었다. 여름에 원유 생산량이 줄어드는데, 반대로 소비는 늘어나는 시기라 동절기에 원유가 남는다고 원유 가격을 낮추면 폐업 증가 등으로 농가 생산량이 줄어 하절기 우유 부족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우윳값이 비싸진 건 유가공 업체의 유통 마진이 지나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한국낙농육우협회 관계자는 "선진국 유통 마진이 10% 수준인데 국내 유통마진은 38%에 달한다"며 "20년 동안 원유 가격은 L당 454원 올랐는데 우윳값은 1,228원 상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근본 문제는 외면한 채 가뜩이나 힘든 낙농가 수익만 줄이려 하니 농민이 분통이 터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 급기야 "협상 중단"…더 팽팽해진 대립각
정부와 낙농가의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는 사이, 이미 결론냈어야 할 새 원유 가격 조정도 미뤄지고 있다. 정부 정책을 반기는 유가공 업체가 먼저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며 가격 협상을 거부하면서다. 유가공 업체와 낙농가 관계자로 구성되는 '원유기본가격조정협상위원회'(협상위)는 매년 5월 통계청이 발표하는 축산물 생산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원유 납품 가격을 결정해 8월 1일 적용한다.
이 가운데 정부가 최근 낙농가와 협의를 잠정 중단하면서 상황이 더 꼬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농식품부는 지난달 28일 "최근 낙농협회와 정부 간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협의를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최근 낙농가를 대상으로 개최한 개편안 설명회 참석률이 저조한 것이 협의 중단의 배경이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낙농육우협회는 이날 성명에서 "정부가 새 대안을 제시해 낙농가의 입장을 설명하고 최대한 합의점을 찾으려 했는데 구체적 사유도 밝히지 않은 채 논의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며 당혹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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