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인터뷰>
광화문광장 발굴 문화재 자문역
조선시대 권력 중심지 육조거리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계기 실체 확인
"일제 침탈 왜곡된 역사성 회복 계기로"
광화문광장을 품은 서울 세종로의 원형은 지금으로부터 627년 전인 태조 4년, 조선 정궁인 경복궁 완공과 함께 탄생한 '육조(六曹)거리'다. 광화문에서 뻗어 나온 길을 사이에 두고 육조와 삼군부, 의정부 등 당대 최고 권력기관들이 들어섰고, 거리에는 관청에 민원을 넣으러 온 이들이 몰려들었다.
굳건했던 육조거리의 아성은 외세 침략을 받으며 흔들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경복궁과 관청이 파괴된 탓에 그 위상을 창덕궁 앞 돈화문로에 넘겨주고 수세기를 빛바랜 관아거리로 남았다. 고종의 경복궁 중건으로 형세를 되찾는가 싶었지만, 일제 침탈에 '광화문통'으로 개칭돼 식민도시의 모습으로 변형됐다.
육조거리 흔적을 찾는 일은 역사학계의 숙원으로 남았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을 앞두고 고고학을 연구하는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가 설렜던 것도 이 때문이다.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에 자문역으로 참여한 신 교수는 22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재구조화 사업을 계기로 조선사 단면을 직접 확인한 셈"이라고 말했다. 비록 유구(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흔적)는 새 광장 밑에 다시 잠들게 됐지만, 공간의 역사성은 적이 회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내달 6일 재개장을 기념해 신 교수의 소회를 들었다.
-발굴은 어떻게 진행됐나.
"2019년 3~11월 시험발굴조사를 거쳐 이듬해 10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정밀발굴을 진행했다. 개발 행위에 앞서 긴급하게 이뤄지는 '구제발굴'이라, 경북 경주나 충남 부여에서 하는 학술발굴처럼 정교하게 진행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관청 터를 비롯해 다양한 유구를 확인했다."
-삼군부와 사헌부, 병조∙형조∙공조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시대 권력의 상징이자 중심지 실체를 최초로 확인한 것이라 의의가 크다. 예컨데 사헌부 입구에 우물이 있었다는 점은 발굴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사실이다. 서울시내 지하의 많은 하수관로·전선 때문에 얼마나 훼손돼 있을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다행히 보존 상태가 의외로 양호해 사헌부 터 일부는 그대로 개방해서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도록 조성 계획을 변경했다."
-2009년 광장 최초 조성 때는 왜 확인하지 못했나.
"발굴은 굴착으로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는 곳만 하는 게 원칙이다. 파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훼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광장 서측 도로, 즉 관청 터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 구역 위에 나무를 심게 돼서 진행한 것이다. 과거 해치마당 인근 일부를 발굴했지만 애당초 건물이 있을 위치는 아니었다."
-유구는 흙으로 다시 덮었다. 위에 심는 나무가 훼손할 우려는 없나.
"광장 조성 일환으로 진행한 발굴이라 현재로서는 문화재가 망가지지 않도록 복개하고 기록해서 후대에 남겨줄 필요가 있다. 만약 유구가 지표면 10㎝ 밑에서 나왔다면 식재가 어렵겠지만, 다행히 1.5~3m 깊이라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뿌리가 너무 깊이 자라지 않는 품종으로 선정했다."
-전임 시장이 추진한 사업을 오세훈 시장이 '역사성'을 강화해 물려받았다.
"육조거리는 사람이 모이고 임금∙관료와 소통하는 장소였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새 광장은 넓어진 게 아니라 일제 때 훼손된 공간을 일부 회복한 셈이다. 100년 전 총독부가 들어서고 변형된 공간을 우리 힘으로 돌이킨다는 의지 표명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광장 북쪽 월대와 해치상 복원 사업도 연계해 진행 중이다. 앞으로 과제는.
"궁극적으로는 정부서울청사 자리 삼군부 터와 맞은편 의정부 터를 같이 복원시켜야 한다고 본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광화문은 600여 년 만에 권력의 중심에서 온전한 역사의 중심이 됐다. 세계적인 역사 테마 파크를 조성해보는 거다. 그러면 BTS나 오징어 게임 같은 한류 열풍을 일으킨 한국이 몇백 년 전부터 엄청난 콘텐츠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국내외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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