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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재단서 5년간 여유 준 지원 덕에 허준이 '필즈상' 꽃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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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재단서 5년간 여유 준 지원 덕에 허준이 '필즈상' 꽃 피웠다"

입력
2022.07.28 14:00
수정
2022.07.28 18:25
0 0

박형주 전 아주대 총장이 본 '허준이의 잉여'
"당장 성과보단 긴 호흡 연구환경 제공해야"

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 한국일보 DB

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 한국일보 DB


"마음이 여유로운 상태가 되어야만 아주 순수한 잉여로운 수학이 활짝 피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7월 13일 필즈상 수상기념 강연 직후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

잉여(剩餘)의 사전적 의미는 '쓰고 남은 것'이지만, 이 단어가 사람의 활동과 관련해서 쓰이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모욕적 표현이 될 수 있다. 남들이 일할 때도 일하고 놀 때도 일해야 했던 압축성장을 수십 년 거듭한 이 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빈둥거리는 듯 보이는 '잉여로움'은 그저 비생산적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래서 40세 이전에 독보적 업적을 달성해 필즈상을 받은 젊은 수학자가 자신의 성장 비결을 잉여라는 단어로 설명했을 때, 그 울림은 컸다. 수십 년 묵은 수학계의 최고 난제를 잇달아 풀어 찬사를 받은 수학자가 영광의 순간 떠올린 잉여로움, 여유로움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수학자가 누려야 할 잉여의 가치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사람을 만났다. 서울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박형주(58) 아주대 수학과 석좌교수(전 아주대 총장)는 허준이 교수가 누렸던 여유로움의 비결, 그리고 성과에 쫓겨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한국 수학계(기초과학계)의 현실을 털어놓았다.

국제수학연맹(IMU) 집행위원을 지내며 누구보다 세계 수학계 사정에 밝은 박 교수는 "순수 학문인 수학은 시간을 두고 진짜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며 "당장의 성과에 매인 연구만 하기보다는, 학계가 주목하는 주요 문제에 긴 호흡으로 뛰어들어야 큰 학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준이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27일 서울대 상산수리과학관에서 필즈상 수상기념 강의를 하고 있다. 뉴시스

허준이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27일 서울대 상산수리과학관에서 필즈상 수상기념 강의를 하고 있다. 뉴시스


'신속한 성과'만 요구하는 한국 학계

대개 순수 수학을 일생의 업으로 선택한 수학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 거기까지 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막상 수학으로 먹고살기 위해 그들이 넘어야 하는 현실의 벽은 높다. 박사학위를 따면 그때부터 진짜 성과 경쟁이 시작된다. 박사 후 연구원(포닥) 기간은 보통 2, 3년 안에 끝나는데, 그 안에 교수로 임용이 되거나 안정적 직장을 얻을 만한 성과를 내야 한다.

짧은 기간 안에 결과를 내려면 수학자는 자기 능력을 검증된 울타리 안에 가두고 그 범위 내에서 연구할 수밖에 없다. 학문적으로 만개할 가능성이 높은 최전성기지만, 나의 미래와 가족을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있는 '간 큰 수학자'는 많지 않다.

"한국은 특히 대부분 연구과제에 조건이 까다롭고 빠른 성과를 요구하지요. 그런데 연구 조건이 많고 기간이 짧을수록, 수학자 개인으로서는 진짜 중요한 연구에 도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느긋했던 수학자가 조급해지는 이유에 대한, 박 교수의 설명이다.


허준이에게 주어진 5년의 여유

다행히 미국에서 공부하던 허준이 교수에겐 하고 싶은 연구에 집중할 기회가 주어졌다. 박사 과정 1년 차에 리드 추측을 증명해 낸 허 교수를 눈여겨봤던 미국 클레이재단은 그를 펠로십 연구원으로 선정했고 2014년부터 5년 동안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스턴 출신 기업가 랜던 클레이의 후원으로 설립된 이 재단은 펠로십 연구원에게 최고 수준의 급여와 연구비를 지원한다. 박 교수는 "클레이재단은 펠로십으로 뽑은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지원한다"며 "논문 개수로 연구자를 판단하지 않고, 연구비 지급에 대한 제한도 매우 느슨하다"고 소개했다.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도 주거와 급여가 보장되고, 전 세계 어떤 연구소에서든 자유롭게 일할 수도 있다.

실제 허 교수는 클레이재단 지원 시절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성과와 생계 걱정 없이 긴 호흡으로 연구를 이어가면서도, "몇 년만 희생해 달라"고 가족에게 사과할 필요도 없었다. 여유가 넘치는 그 잉여로움 속에서 허 교수는 만개했다. 그 기간 동안 행렬로 표현되지 않는 일반적 매트로이드에서도 대수기하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데 성공했고, △로타 추측 △웰시 추측 △메이슨 추측 등 난제를 연이어 증명했다.

사람을 믿고 무조건적 지원을 한 클레이재단의 투자는 실제 성과로도 이어졌다. 허 교수를 포함해 올해 필즈상 수상자 2명을 배출했고, 2014년 3명, 2018년 2명의 필즈상 수상자가 이 재단 펠로십 연구원 출신 중에 나왔다.

1927년 5차 솔베이 회의 기념사진. 사진을 찍은 29명의 과학자 중 17명이 노벨상 수상자다. 앞줄에는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운뎃줄에는 루이 드브로이와 닐스 보어가, 뒷줄에는 에르빈 슈뢰딩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모습이 보인다. <자료출처: 벨기에 화학회사 솔베이 홈페이지>

1927년 5차 솔베이 회의 기념사진. 사진을 찍은 29명의 과학자 중 17명이 노벨상 수상자다. 앞줄에는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운뎃줄에는 루이 드브로이와 닐스 보어가, 뒷줄에는 에르빈 슈뢰딩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모습이 보인다. <자료출처: 벨기에 화학회사 솔베이 홈페이지>


한국의 클레이재단은 가능할까

성과로 학자를 판단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학자를 신뢰하는 이런 지원 시스템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박형주 교수는 "민간이 관심을 가지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가 지원에서는 재원 낭비나 특혜 지적이 나올 수 있어 쉽지 않지만, 지원 조건이 자유로운 민간 재단은 기초과학자의 '잉여로움'을 보장하는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기초학문 발전에서 민간 재단은 없어선 안 될 역할을 했다. 기업가가 순수학문을 지원하는 것은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벨기에 기업가 에르네스트 솔베이가 지원한 국제학회(솔베이 회의)는 5차 회의 참석자 29명 가운데 17명이 노벨상 수상자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의에서 오늘날 양자물리가 태동했다. 박 교수는 "수학은 연구자가 바로 실험실"이라며 "세계인 연구자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깊이와 폭이 커진다"고 말했다.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화두에 오른 여유로움은 수학교육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다. 허 교수의 수학적 재능은 서울대 3학년 때 김영훈 교수를 만나 복수전공을 결심할 당시에도 있었다. 그 전까지 수학에 정을 못 붙인 것은 '입시 수학'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한된 시간 동안 오류 없이 정답만 적어내는 풀이에는 뛰어나지 못했으나, 여유가 주어지자 인류가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연이어 해결했다. 100분간 30문항을 풀기에 너무 느렸던 그의 수학은, 사실은 아주 빠른 것이었다. 박 교수는 "반복을 통해 문제 유형별로 신속하게 답을 내는 방식의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가르치지 못한다"며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우리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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