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8명의 서핑 도전
'장애인은 못 할 것'이란 편견 많지만
"장애인은 다양한 사람 중 한명일 뿐"
'장애인·비장애인 어울리는 사회' 바람도
"지금까지 '서핑'과 '파도'는 머릿속 단어로만 존재했죠. 정사각형 모양의 스티로폼을 타는 건 줄 알았는데, 긴 보드를 처음 만져 보니 설레더라고요. 보이지 않는 물에 빠질 생각에 덜컥 겁이 났지만, 막상 빠져 보니 금방 적응되던데요."
지난달 1일 경기 시흥시의 실내 인공 서핑장 시흥웨이브파크에서 시각장애인 8명이 서핑 도전에 나섰다. 2020년 10월 서핑장이 문 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 러닝크루 활동과 요가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시각장애인 하지영(35)씨에게도 첫 경험이었다.
간혹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외국인이 서핑을 즐기러 오거나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개인레슨은 있었지만, 시각장애인 여러 명이 한꺼번에 서핑 도전에 나선 건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한국에서 장애인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앞이 보이지 않는데 과연 파도타기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예상을 깬 반전의 연속에 참가자, 진행자, 행사 주최 측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드를 딛고 서 자세를 잡는 '테이크오프'를 3명이나 성공했다. 서핑을 배운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테이크오프를 하는 건 비장애인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놀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고, 옆에서 서핑하던 비장애인들도 동작을 멈추고 구경했다. 테이크오프에 성공할 때마다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테이크오프, 절반 가까이 성공
서핑에 대한 기본 강의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패들링(보드에 몸을 밀착해 팔을 저어 나가는 동작) 정도만 가능할 걸로 봤다. 단지 경험해 보지 못한 걸 체험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시각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해 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아 불편했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서툴렀지만, 도전하는 자세는 비장애인과 똑같았다. 하지영씨는 "우리는 뭘 배우려고 해도 문전박대당하는 게 부지기수"라며 "우리에겐 글자로만 존재했던 일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비영리단체인 사단법인 '오늘은'은 하씨의 이런 바람을 담아 이번 체험을 기획했다. 하씨처럼 익스트림 스포츠를 경험하고 싶다는 장애인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강국현 오늘은 사무국장은 "장애인들이 '가장 하고 싶은 문화·체육 활동'에 대해 조사했더니,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높았다"며 "요즘 청년들이 즐기는 서핑을 하면 어떨까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날 서핑 체험을 위해 오늘은은 4월부터 준비했다. 장애인들의 체험 활동을 기획하다 보면 업체 대부분 '장애인은 어렵다'는 냉정한 답이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장애인들이라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사리는 업체가 많다.
"비장애인보다 느릴 수 있지만 기회의 문턱은 넘었으면"
시흥웨이브파크가 오늘은의 문의에 답한 건 5월 초였다. 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즐길 기회라 생각해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정말 괜찮을지 확신이 들진 않았다. 강사들이 직접 눈을 가리고 타 보고, 물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할지 보름간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뒤 결정했다. 우지은 시흥웨이브파크 과장은 "해외에선 서핑이 심리 치료에 쓰일 정도로 좋은 운동이라 내부에선 해내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면서도 "시각장애인은 물에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두려움이 커 안전에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습이 시작된 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깬 소중한 기회였다고 했다. 테이크오프 강습은 원래 계획에 없었지만, 파도를 타겠다는 참가자들의 강한 의지에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 과장은 "장애인이란 이유로 우리가 너무 '안 된다, 힘들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장애인들의 용기에 직원들도 크게 감동받았다"고 뿌듯해했다.
체험이 끝난 뒤 시각장애인과 자원봉사자, 기획자, 서핑 업체 모두 장애인들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이 바뀌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하씨는 "보이지 않아 남들보다 느릴 수 있지만, 배움의 문턱을 넘을 수 있게 우리를 외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과 어울리면 과잉배려·편견의 벽 넘을 수 있죠"
시각장애인들의 바람은 또 있다. 장애인끼리 따로 체험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비장애인이 같이 어울릴 기회가 생기길 기대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장애인이란 울타리에 갇혀 지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적다 보니 어색하게만 느껴지고, 과잉 배려로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편견의 벽도 넘을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하씨와 함께 시각장애인 러닝크루에서 활동하며 서핑 체험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장태기(31)씨는 "장애인들과 어울리다 보면 비장애인보다 조금 불편한, 다양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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