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소수인종 총리 탄생 기대감
인종은 다양하나 정치이념은 우편향
"부유한 중산층 백인 남성" 표심 공략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후임을 뽑는 영국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소수인종,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 배경을 지닌 의원들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1차 투표를 통과한 후보 6명 중 절반이 아시아계 또는 아프리카계이고, 성비로 따져도 여성이 4명으로 더 많다. 누가 당선되든 영국 정치사에는 새로운 이정표다. 그러나 다채로운 겉모습과 달리 이념과 정책에선 ‘다양성 존중’을 찾아볼 수 없다. 반(反)이민주의,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거나 감세를 대놓고 주장하는 등 ‘강경 보수’를 표방하는 후보들도 있다. “백인보다 더 하얗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당대표 경선 2차 투표 진출자 절반이 소수인종
14일(현지시간) 치러진 영국 보수당 대표 경선 2차 투표에는 ‘1차 투표 1위’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을 비롯해 페니 모돈트 국제통상 담당 부장관, 리즈 트러스 외무장관, 케미 배디너크 전 평등담당 부장관, 톰 투겐드하트 하원 외교위원장, 수엘라 브레이버먼 잉글랜드·웨일스 법무장관 등 6명이 진출했다. 영국은 내각제라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다.
사상 첫 소수인종·이민자 출신 총리가 탄생할 확률은 현재 50%다. 수낙 전 장관과 브레이버먼 장관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났고, 배디너크 전 부장관은 런던 태생이지만 나이지리아인 부모를 따라 나이지리아에서 성장했다. 존슨 총리가 보수당 대표로 당선된 2019년에는 후보 10명 가운데 9명이 백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한 진전이다. 게다가 브레이버먼 장관과 배디너크 전 부장관, 모돈트 부장관, 트러스 장관은 마거릿 대처(1979~1990년 재임)와 테레사 메이(2016~2019년 재임)를 잇는 세 번째 여성 총리 후보이기도 하다.
영국 싱크탱크 ‘브리티시 퓨처’ 선더 카트왈라 소장은 “보수당 지도부는 서구 민주주의 체제 어느 정당에서도 이루지 못한 인종적 다양성을 보여준다”며 “변화는 거대하고 속도는 놀랍도록 빠르다”고 말했다. 1차 투표에서 떨어진 나딤 자하위 재무장관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압제를 피해 어린 시절 영국으로 건너온 쿠르드족 출신이었다.
"낡은 보수당 바꿔야" 20년 인재 영입 결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영국이 ‘탈인종주의 사회’로 진화했다고 평가하기엔 이르다”면서도 “다만 우연적 결과가 아닌 보수당이 20년에 걸쳐 인재를 영입하고 투자한 데 따른 결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보수당 현대화를 이끈 선구자로 2005년 당대표에 취임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2010~2015년 재임)를 꼽았다.
캐머런 전 총리는 “백인 일색에 남성적이며 낡아빠진 보수당을 바꾸겠다”며 보수당 텃밭 지역구에서 소수인종 및 여성 정치 유망주를 적극 발굴했다. 팀 베일 런던 퀸매리대 정치학 교수는 “소규모 사업에 종사하고 가족 중심적이며 높은 세율에 반감을 품은 이민 1, 2세대가 보수당의 새로운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보수당에 소수인종 의원은 2명, 여성 의원은 17명뿐이었지만, 다음 선거에선 각각 11명과 49명으로 늘었고, 현재는 22명, 87명에 달한다.
"누가 총리 되든 중산층 백인 남성층 이익 대변"
그러나 보수당이 다양성을 수용했다고 해서 사회적 소수자를 포용한 건 아니다. 신임 총리 후보들의 지향은 출신 배경, 정체성과 전혀 상관없다. 소수인종 후보 3명 모두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했고, ‘정체성 정치’를 단호히 거부한다. 브레이버먼 장관은 이민가정 출신임에도 출마 선언 당시 이민자들을 “쓰레기”라 지칭하면서 “영국해협을 건너는 불법 이민자들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배디너크 전 부장관은 내각에서 ‘평등담당’ 직함을 달았으면서도, 출마 행사장 내 ‘성중립 화장실’을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재배치했다. 수낙 전 장관도 트랜스젠더 여성의 스포츠 경기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
베일 교수는 “정치 성향은 백인보다 더 하얗다”고 꼬집었다. 실제 소수자 집단에서 지지세도 약하다. 2019년 총선에서 흑인 및 소수인종 유권자 64%가 노동당을 지지했고, 보수당은 20% 득표에 그쳤다.
더구나 보수당 대표는 당원들이 뽑는다. 총리 후보는 다양하지만 당원 성향은 다양하지 않다. 2020년 런던 퀸메리대 연구에 따르면 보수당 당원 95%가 백인, 63%가 남성, 58%가 50대 이상, 80%가 중산층 이상이었다. 누가 총리가 되든 “부유하고, 나이든, 백인, 남성”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란 얘기다. “대처주의의 또다른 변종들 간 경쟁”이라는 혹평까지 나온다. 경제학자 파이자 샤힌은 “보수당이 인종적 다양성에서 진전을 이뤘지만, 사회적 계급과 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구분선으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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