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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가 등장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며

입력
2022.07.13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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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금지된 사랑을 그린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는 비극적 감정의 진폭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CJ ENM 제공

금지된 사랑을 그린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는 비극적 감정의 진폭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CJ ENM 제공

클래식 음악 중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인기를 얻게 된 작품이 꽤 많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쇼팽의 녹턴, 여기에 재즈와 영화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보물 같은 음악들은 영화에 쓰이면서 각별한 의미를 얻었고 영화도 특별하게 만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최신작 '헤어질 결심'에는 지휘자 정명훈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한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흐른다. 워낙 유명한 곡이니 영화 속 장면과 잘 붙을까 싶었는데 아름다운 로맨스의 끝에 긴 한숨과 먹먹함을 남기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공연장에서 박찬욱 감독을 본 음악 애호가들이 꽤 있을 것이다. 특히 노령의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리사이틀이 열린 소극장, 객석 절반도 못 채운 현대음악 앙상블의 공연장, 통영국제음악당 같은 음악 마니아가 찾는 장소여서 더 반가웠을 것이다.

박 감독의 많은 영화가 짧은 문장으로 툭툭 던지듯 쓴 그의 글과 닮았다. 등장인물마다 성격도 강하고 할 이야기도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미적거림이나 과장된 흐느적거림 없이 깔끔하게 요점을 전달한다. 그래서일까. 장면마다 이유 있는 역할을 해 왔던 음악도 비슷한 맥락이다. '헤어질 결심' 속 말러가 영화의 호흡처럼 천천히 읊조리는 시와 같았다면 이전 영화의 음악은 짧은 문단으로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 간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에는 바흐, 비발디가 등장한다. 담백한 표현을 지향하는 바로크 음악은 장면과 이야기에 짧은 호흡과 재치 있는 템포, 감각적 전환을 만들어 낸다. '아가씨'에서 히데코가 음란 서적을 읽을 때에는 서적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당대 음악인 장 필립 라모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 모음곡 e단조'가 흐른다. 고풍스럽고 세련됐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뒤틀어진 등장 인물들의 일상 묘사는 '찌그러진 진주(Baroque)'인 바로크 음악이 절묘했다.

박 감독은 사석에서 고음악 해석의 거장 조르디 사발을 좋아한다고 자주 언급했다. 영웅이라는 표현을 쓴 적도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는 조르디 사발이 연주하고 아리아나 사발, 몽세라 피구에라스가 노래한 자장가 '엄마, 엄마, 나를 울리지 말아요'가 흐른다. 초반에는 연주곡으로 들려주는데, 복수를 마친 금자씨가 딸과 마주한 마지막 장면에는 가사가 있는 아티스트의 노래 원곡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감독의 필모그라피 중 '복수 3부작'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귀와 가슴에 깊이 파고든 모녀의 자장가 때문에 유혈의 복수보다는 딸에게 용서를 구하는 엄마, 금자씨의 아픔이 더 깊게 남는다. 음악이 이야기 전개나 결말을 전하는 내러티브 역할을 한 것이다. 감독은 영화가 음악을 잘 만났다고 했고, 2019년 내한공연으로 한국을 찾은 조르디 사발은 무대 뒤에서 만난 박 감독에게 자신의 음악을 써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박 감독의 첫 할리우드 제작 영화 '스토커'에는 현대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거장 필립 글래스의 음악이 등장한다. 극 중 찰리와 인디아가 한 의자에 앉아 글래스의 음악을 피아노 듀엣으로 연주한다.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는 이 장면에는 피아노 건반 위에 두 사람의 손이 서로 겹쳐 어긋나게 연주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시나리오를 읽고 글래스가 제안한 제스처였다. 박 감독은 그 모습이 무척 관능적으로 보였고 마음에 들어 시나리오를 고쳐 찍었다고 한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작곡가, 작곡가의 음악을 좋아하는 감독이 함께 만든 장면이다.

박찬욱 감독. CJ ENM 제공

박찬욱 감독. CJ ENM 제공

박 감독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타지아'(1960)를 보고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바로크 음악의 취향은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 이후부터라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는 박 감독의 영화를 보고 조르디 사발과 필립 글래스를 알게 되지 않았을까.

일상에서도 자주 듣게 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오프닝에 등장하며 크게 알려졌다. 두 영화와 음악은 서로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게 됐다. 큐브릭이 영화에 소개한 리게티, 쇼스타코비치, 슈베르트, 로시니의 음악은 파격적 영화 속 장면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덕분에 영화에 소개된 클래식 음악 작품들은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됐고, 지금도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게 됐다.

최근 몇 년간 박찬욱 감독은 쇼스타코비치 관련 서적과 현악4중주, 교향곡을 가장 많이 읽고 듣는다고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유롭지 못한 정치 환경에서 평생 두렵고 위태로운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하지만 감독의 눈에 작곡가는 재치와 유머와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음악 애호가 박찬욱 감독이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재치와 유머를 널리 알리게 되고 그 작품들이 무대에 자주 오르게 되면 좋겠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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