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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에 민심 폭발… 스리랑카 대통령 가문 통치 끝장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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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에 민심 폭발… 스리랑카 대통령 가문 통치 끝장냈다

입력
2022.07.10 09:55
수정
2022.07.10 22: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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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팍사 대통령 "13일 사임"… 총리도 동반 퇴진
시위대 10만 명 콜롬보 운집… 총리 관저엔 방화도
1948년 독립 이후 첫 디폴트… 경제난에 민심 폭발

9일 스리랑크 수도 콜롬보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집무실로 몰려가 국기를 흔들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콜롬보=AFP 연합뉴스

9일 스리랑크 수도 콜롬보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집무실로 몰려가 국기를 흔들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콜롬보=AFP 연합뉴스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은 스리랑카 정부가 수개월간 지속된 반정부 시위에 백기를 들었다. 쌀 한 톨, 기름 한 방울 구할 수 없는 극심한 생활고에 분노한 시민들이 “정권 퇴진”을 외치며 대통령궁으로 몰려오자 대통령과 총리가 결국 권좌에서 내려왔다. 대통령 친인척들이 20년 가까이 정부 요직에 앉아 나라를 사유화했던 ‘가문 통치’도 막을 내렸다.

초유의 대통령·총리 동시 사임

9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마힌다 야파 아베이와르데나 스리랑카 국회의장은 이날 밤 성명을 통해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이 평화롭게 권력을 이양하고 13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고 밝혔다. 이어 “이제 나라에 더는 소란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며 “모든 국민은 법을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앞서 몇 시간 전에는 라닐 위크레메싱게 총리도 내각 회의를 소집한 후 “새 정부가 구성되면 정부를 떠날 것”이라며 사임 의사를 전했다. 반정부 시위가 연일 격화하는 데다 각 정당 지도부까지 대통령과 총리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퇴진을 요구하고 나서자, 더는 버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9일 스리랑카 반정부 시위대 참가자가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사임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휴대폰으로 시청하고 있다. 콜롬보=EPA 연합뉴스

9일 스리랑카 반정부 시위대 참가자가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사임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휴대폰으로 시청하고 있다. 콜롬보=EPA 연합뉴스

대통령과 총리가 물러나면서 아베이와르데나 국회의장은 스리랑카 헌법에 따라 최대 30일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다. 의회는 30일 이내에 라자팍사 대통령 대신 임기를 채울 새 대통령을 의원들 중에서 선출해야 한다. 라자팍사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2024년까지 2년이다. 과도정부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전체 정당이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스리랑카 사유화한 가문 정치 종말

올해 들어 스리랑카 경제난이 급격히 심화하면서 고타야바 라자팍사 대통령은 거센 퇴진 압박을 받아 왔다. 국민들 사이에선 특히 ‘라자팍사 가문 통치’에 대한 분노가 컸다. 2019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라자팍사 대통령은 2005~2015년 대통령을 지냈던 친형 마힌다 라자팍사를 총리에, 동생ㆍ맏형ㆍ조카를 장관직에 앉혀 놓고 나라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정실 인사는 마힌다 재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라자팍사 대통령도 당시 국방장관을 맡아 타밀족 반군과의 내전을 지휘하며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2015년 대통령 선거 패배로 물러났던 라자팍사 가문은 2019년 4월 무려 270명이 숨진 부활절 연쇄 테러 이후 ‘반무슬림’ 정서를 등에 업고 부활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 닥친 극심한 경제난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했고 급기야 지난 4월에는 경찰이 실탄을 발사해 1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다치는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다. 정국 수습을 위해 ‘라자팍사 장관’ 3인 등 내각이 총사퇴한 데 이어 5월 초 마힌다 총리마저 사임하고 위크레메싱게 총리가 새로 임명됐으나, 성난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 20년간 스리랑카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라자팍사 가문의 종말”이라고 평가했다.

9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집무실에 난입한 시위대가 정원 수영장에 뛰어든 모습. 콜롬보=AFP 연합뉴스

9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집무실에 난입한 시위대가 정원 수영장에 뛰어든 모습. 콜롬보=AFP 연합뉴스


분노한 민심, 대통령궁·총리 관저 난입

이날도 수도 콜롬보에는 10만 명이 운집했다. 오후가 되면서 대통령궁은 시위대에 완전히 포위됐다. 일부는 경찰 방어망을 뚫고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에 난입했다. 시민 수백 명이 대통령궁 로비와 정원에 들어찬 광경, 관저 수영장에 뛰어들어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침대에 누워 사진을 찍거나 주방에서 차를 끓이는 모습 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다. 시위대는 위크레메싱게 총리의 자택에도 들어가 불을 질렀다.

경찰은 주말 시위를 막기 위해 전날 밤 9시 통행 금지령을 내렸으나 반발이 거세지자 이날 오전 8시에 해제했다.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했다. 정부가 기차와 대중교통 운행을 중단시켰더니 전날 출발해 밤새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콜롬보로 왔다. 트랙터를 몰고 온 참가자도 있었다. 다시 거리에 모인 시위대는 국기를 흔들며 대통령궁으로 행진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면서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최소 55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부상자 중에는 스리랑카 동부 출신 현직 의원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9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내부에 난입한 모습. 콜롬보=AP 연합뉴스

9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내부에 난입한 모습. 콜롬보=AP 연합뉴스


파탄난 경제… 1948년 독립 이후 첫 디폴트

스리랑카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관광산업 붕괴와 대외 부채 급증, 재정 정책 실패 등이 겹치면서 1948년 독립 후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다. 연료, 의약품, 식품 등 필수품 부족이 계속되면서 민생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 4월 12일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외 부채 상환을 유예한다며 ‘일시적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고, 5월 18일 기한 내 국채 이자를 갚지 못해 공식 디폴트 상태에 돌입했다. 총 외채는 510억 달러(약 66조 2,000억 원)에 이른다.

최근에는 석유 재고도 다 떨어져 필수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모든 연료 판매를 중단했다. 주유소마다 대기 줄이 수㎞ 늘어선 광경은 이제 일상이 됐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병원들은 응급수술도 못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연료를 수입하려 해도 돈이 없다”며 “가게 진열대는 텅 비었고 몇 달 전까지 중산층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끼니를 굶고 있다”고 전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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