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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핍박에도 붓을 쥐고 있었다" 200여년 전 여성 화가의 자기 증명

입력
2022.07.05 08:51
수정
2022.07.29 12:4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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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1> 자기인식을 위한 그림, 자화상

중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한 후 집에만 오래 머물렀던 남학생 A군을 위해 특별한 미술 수업을 했다. 나는 A군에게 대뜸 셀카(self camera)를 여러 장 찍어보라고 주문했다.

"셀카요?"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한다. "응. 가능하면 셀카를 찍는 장소를 바꿔가며 찍어 보렴."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자화상을 그리는 수업을 하기로 했다. A군은 한 번도 셀카를 찍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앵글 잡고 조명까지 고려하며 '나를 드러내기' 시도를 하지 않는 성향이니까. 무엇보다도 아이는 남과 다르다는 심리적 위축감으로 자기 인식이 옅은 상태다. 본격적으로 자화상을 그려보기에 앞서 자화상에 대해 아이와 함께 알아보기로 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미술사의 거장들이 있다. 최초의 진정한 자화상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년)에서부터, 잘나가던 시절의 화려함과 늙고 추해진 노년의 진솔함을 담은 연작 자화상을 그린 렘브란트(1606~1669년), 모델 살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거울 앞에 선 가장 싼 모델로 그림 훈련을 했던 자화상 매니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년), 평생 서른 번이 넘는 대수술로 뼈 하나 성한 곳이 없었던 프리다 칼로(1907~1954년),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경자 (1924~2015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얼굴을 작품의 주제이자 화두로 삼았던 예술가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초상화와 자화상은 전혀 다르다. 기술의 발달로 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장인으로서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오늘날의 사진사와 같은 역할로 수백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초상화 의뢰는 화가와 조각가들에게는 생계수단이었다. 그런 시대에 살았던 뒤러는 심지어 신성한 성자의 느낌이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그렸고, 그 옆에 "그리하여 나는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26세의 뒤러이다"라는 금빛 서명을 남겼으니, 이는 자기 저작권에 대한 강렬한 의지이자 '먹고사니즘'을 초월한 자의식의 초석이라 할 만하다. "너의 모습을 작품으로 그려다오"라며 물감과 붓에 들어가는 제작비와 인건비를 지불하며 화가의 자화상을 의뢰하는 사람이 당시에 누가 있었겠는가? 뒤러는 이미 그 지역의 귀족층과 중산층에, 심지어 하층 농민들도 그의 모사품을 집에 두고 싶어할 정도의 '스타'였고, 이에 상응하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베르트 뒤러 '자화상'(1500년) 독일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 '자화상'(1660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천경자 '두상'(1982년) △프리다 칼로 'Diego on my mind' (194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고흐 '자화상'(1889년), 개인소장.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베르트 뒤러 '자화상'(1500년) 독일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 '자화상'(1660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천경자 '두상'(1982년) △프리다 칼로 'Diego on my mind' (194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고흐 '자화상'(1889년), 개인소장.

그러나 경제적 안정이 선행되어야 자의식 표출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시리즈에서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한때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았으나 가족들 대부분이 먼저 죽고 화구와 몇 벌의 옷만이 남겨졌다던 노년의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을 HD 화면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 풍진 삶의 자기고백 같은 그의 노년의 '셀카'는 그래서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비싼 작품으로 호명됐다. 한쪽 귀를 잘라낸 경위에 대해 지금도 이견이 분분한 고흐의 자화상도, 또다시 임신에 실패하여 자신의 찢겨진 자궁을 자화상으로 담은 칼로의 자화상도, 갈등의 일상 속에서 나비와 꽃을 머리에 이고 싶었던 천경자의 자화상도, 그리하여 "나라는 사람, 이런 삶을 살았음"이라는 한 줄 증명처럼 남겨져 있다.

오로지 검은색 바탕이 전부였던 뒤러의 자화상에서부터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 속에 자신의 모습을 안치한 천경자 화백의 자화상까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저 눈코입이 아닌 어떤 또 다른 자아가 보인다. 그것은 '배경(background)'의 표현과 묘사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어떤 상황과 공간, 시간 속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대상으로서의 인물이 전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의 눈코입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 자화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작품으로서의 자화상은, 다시 말해서 강렬한 자의식의 자기 증명은 예술가가 정한 어떤 '설정'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작품 의도라고 부른다.

모든 셀카는 '설정샷'이다. 벚꽃이 화려하게 핀 산책로, 사람들이 넘쳐나는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의 자기 모습, 또는 영하 10도의 한파 속에 길을 걷다가 문득 폰을 들어 "춥다"며 찍어본 한 장의 셀카에도 자아는 어떤 상황 속에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채, 오직 고급스럽고 화려한 사물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는 공허한 나르시시즘이 될 수 있다.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표현하는 배경 설정은 따라서 중요하다.

"선생님, 이것도 자화상이에요? 초상화인 줄 알았어요." 나와 함께 여러 자화상 작품들을 살펴보던 A군이 묻는다. 두 뺨에 꽃잎 물 번지는 어여쁜 아가씨의 모습이다. 누가 보아도 미인이라 부를 만한 18세기 귀족 아가씨의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은 1783년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정식 등록한 세 번째 여성 화가 마리 가브리엘 카페(1761~1818년)의 자화상이다. 버터 바르는 빵칼이나 뜨개실 꿰 놓은 바늘 대신 그녀는 왼손에 파스텔을 들어 보여주며 외치고 있다. "나, 마리 가브리엘 카페, 화가입니다!"라고.

마리 가브리엘 카페 '자화상'(1782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마리 가브리엘 카페 '자화상'(1782년),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마리 가브리엘 카페는 평민 출신으로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났다는 기록 외에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녀가 20세가 되던 1781년, 당시 이미 유명세를 얻고 있었던 귀족 출신의 여성 화가, 아델레이드 라빌 기아르(1749~1803년)의 제자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카페가 아델레이드의 제자가 될 당시의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아델라이드 외에 또 다른 여성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1755~1842년)이 쌍두마차로 여성 화가들의 가능성이 막 열리던 때였다. 이 두 여성과 마리 가브리엘 카페, 그리고 마리 마거릿 카로, 이렇게 네 명의 여성은 1783년 5월 31일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공식 등록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처형당한 이후 궁정 여성 화가들의 입지가 어려워졌고, 네 명의 여성 궁정 화가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아델레이드는 아카데미에 남아 여성 후학을 키우며 남성 회원들의 수모와 멸시에 맞섰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아델레이드 곁을 여동생처럼, 딸처럼 함께했던 사람이 마리 가브리엘 카페였다. 카페는 아델레이드의 임종 순간에도 함께했다.

마리 가브리엘 카페 '마담 뱅상의 아뜰리에'(1808년). 독일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마리 가브리엘 카페 '마담 뱅상의 아뜰리에'(1808년). 독일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마리 가브리엘 카페가 두 뺨에 꽃잎 물 번지는 듯한 첫 자화상을 그린 후, 18년의 세월이 흐른 1808년, 카페는 의미심장한 또 한 편의 자화상을 남긴다. 1808년 '마담 뱅상의 아틀리에'에서 여러 남성 궁정 화가들 사이에서 작업하고 있는 스승 아델레이드와 이를 돕고 있는 카페 자신의 모습을 스냅 사진처럼 연출했다. 흥미로운 것은 정면을 응시한 카페의 모습이다. 18년 전 꿀이 가득한 진주 빛 피부결의 아가씨 얼굴은 이제 없다. 스승 옆에서 물감을 개어주고 있는 백발이 어슷한 중년의 어시스턴트 모습이다. 미간의 주름도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 작품은 스승 아델레이드가 임종 직전 마지막 작업을 했던 당시 상황을 카페가 그린 것으로, 스승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자 존경의 '오마주'로서 남긴 작품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에 유일하게 눈을 맞추고 있는 카페의 모습이 보인다. 화가가 화자로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 주목해 본다면, 이 여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울린다.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1783년 네 명의 여성 회원을 받아들인 이후, 단 한 번도 새로운 여성 회원을 등록시키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여성 회원들을 늘리고 권리를 확장하고자 노력해왔던 스승 아델레이드와 마리 가브리엘의 노력은 그저 무수한 남성 회원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목숨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프랑스 혁명기와 남성 중심의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결국 남성들의 훈수나 듣고 있는 스냅 사진과 같은 작업 풍경 속에서 두 여인의 뺨에는 세월의 피로함이 느껴진다.

마리 가브리엘 카페 '자화상'(1782년·일본 국립서양미술관·왼쪽)과 카페의 '마담 뱅상의 아뜰리에'(1808년· 독일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부분 확대.

마리 가브리엘 카페 '자화상'(1782년·일본 국립서양미술관·왼쪽)과 카페의 '마담 뱅상의 아뜰리에'(1808년· 독일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부분 확대.

200여 년 전의 여성 화가가 남긴 두 개의 자화상에는 빛이 가득한 두 뺨의 젊음이, 그리고 헝클어진 백발의 주름진 마른 두 뺨의 늙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첫 번째 자화상에는 젊은 열정 가득한 화가라는 설정이, 26년이 지난 자화상에는 남성 군중의 틈에서 고단하지만 여전히 붓을 쥐고 있는 화가라는 설정이 그녀가 선택한 ‘배경(background)’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는 답습하지 않는 법이다. 과거의 빛나던 자화상을 초로의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비견할 만큼 카페는 처연한 자기 기록이자 삶의 기록으로서 자신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 속에 생생히 전달되는 숨결이 예술이 주는 에너지인 것이다.

A군이 집안 곳곳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왔다. 어떤 배경의 셀카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묻자 “아무래도 어항이 같이 찍혀 있는 이 사진이요. 사실, 제가 요즘 수족관과 열대어 키우기에 꽂혀 있거든요. 물 속에 있는 나를 그려볼까 싶어요.”

작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어린 청년이 선택한 배경은 연둣빛이다. 단 한 번도 셀카를 찍어본 적 없다는 A군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여러 배경 앞에 두고, 어떤 설정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인쇄해 자화상을 그렸다. 완성된 자화상은 셀카 사진과 똑같이 닮은 10대 남자 아이의 얼굴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눈코입을 가진 어떤 열대어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세상과 단절돼 집밖을 좀처럼 나서지 않았던 외로운 10대 남학생은 연둣빛 물 속에 있는 자기 자신과 만났다. 연둣빛 물 속에서 호흡하는 자신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다음 번 선생님과 만날 때까지 집 밖 야외에서 셀카 2장을 찍는 게 숙제"라는 나의 말에 A군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송주영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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