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구 이사장 "한국, 침체와 재도약의 갈림길에 직면"
1990년대 이후 역대 정권에서 국무총리, 국정원장, 주요 부처 장관을 역임한 국가원로들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윤석열 정부 이후 한국의 국가전략에 대한 고언을 쏟아냈다.
민간독립 싱크탱크인 니어재단(이사장 정덕구)이 창립 15주년을 맞아 3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미래: 성취·반성·회한 그리고 길'을 주제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원로들은 △비현실적 통일론의 지양 △중국을 배려하면서도 미국을 우선하는 외교정책 △저출산·고령화 충격에 대비한 적극적 이민정책 등을 제언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완화, 내각제 도입, 기후변화특위 설치 등도 제시됐다.
정덕구 이사장은 개최사에서 "현재 한국은 추격기, 추월기를 거쳐 정체기에 빠져 있는데, 침체기로 갈지 재도약의 길로 들어설지 갈림길에 서 있다"며 "여러 현자 원로, 석학의 예지와 통찰을 바탕으로 극론의 합일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국가 원로 15명을 비롯해 송호근 포항공과대(포스텍) 석좌교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등 학자 8명이 참석했다. 다음은 주요 인사의 발제 요지.
이홍구 전 국무총리 "중국 슈퍼파워 지위는 인정할 필요"
이홍구 전 총리는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에 대해 "미중 패권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의 상황은 절대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며 "수천년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전통과 정체성을 모두 지켜왔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미중 충돌에 대해 "전쟁이라는 결과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면서 "양측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우리는 그 과정에 어떻게 끼어들고 우리 이익을 지킬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미중 관계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관련해 "중국의 슈퍼파워로서의 지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 헨리 키신저를 인용하며 중국의 적절한 위치를 찾아줄 필요가 있다고 봤다. 북핵문제에 대해선 한미뿐 아니라 동아시아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면서 북한을 설득하지 못하는 중국과 애매한 일본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 "미국 끌어들여 한국 균형자 역할 강화해야"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서는 '인민자결'과 '자유공동체'라는 가치를 먼저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를 폭탄 던지고 쏴 죽인 사람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고, 그의 가치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면서 "그것은 자유에 대한 의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리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며 "당당할 땐 당당해야 한다.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나 북한에도 우리의 헌법적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전략에 대해서는 "지금 미국의 이익은 일본에 가 있다"면서 "우리가 미국을 끌어들여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어떤 대통령제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피할 수 없다"며 내각제를 도입할 것과 승자독식의 선거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북한 비핵화 희박, 북한 홀로 살게 놔둬야"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요인은 정치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시정하려는 한국 사람의 저력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 수 없다"며 "국가 리더십이 이를 잘 이끌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선진국이 된 한국은 앞으로 크게 발전할 수도 있지만, 1980년대 말 황홀한 그림을 그리다가 '잃어버린 30년'을 겪고 있는 일본을 따라가는 것 같다"면서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그는 "사교육비 등 출산과 양육에 드는 비용이 높은 제도 전반을 일대 혁신하지 않으면 출산율 증가가 어려울 것"이라며 "(미국처럼) 적극적 이민정책이라도 펴서 인구구조를 맞춰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경제정책을 종합 고려하는 기획재정부 안에 인구 담당 차관급 부서를 신설할 것을 제언했다. 향후 20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중 관계 속 우리 전략을 꼽았다. 그는 "미국의 역량만으로 모든 문제를 푸는 시대는 지났으며, 미국과 중국 모두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을 실질적으로 원하지 않는다. 북한도 비핵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판단해야 한다. 중국, 러시아를 적대관계로 만들 필요는 없으며 북한은 스스로 홀로 살게 놔두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법치주의, 사법권 독립 흔들리는 우려스러운 상황"
김황식 전 총리는 한국현대사에 대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룬 성공한 역사이지만 과도한 경쟁, 물질만능, 양극화, 노사갈등 등 부작용이 많다"고 평가한 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요소로 사회통합 및 정치선진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확보와 안보를 꼽았다. 특히 정치에서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시정 △민주적 정당제도 △권력구조(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편을 주장했다. 김 전 총리는 "근자에 법치주의와 사법권의 독립이 흔들리는 우려스러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삼권분립과 법관의 독립, 합리적 제도 설정이 중요하다"면서 법원장 직선제에는 대중인기에 영합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 상고법원 설립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행 3심제를 유지하면서 1,2심에서 충실한 심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중국보다, 한미 공유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국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성공한 나라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면서도 "획일적 가치관으로 인한 과잉경쟁이 심각한데 이를 공동체정신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미래를 결정할 핵심 요인으로는 남북관계 및 미국, 중국, 일본과의 관계 정립을 꼽았다. 남북 관계는 "별개의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가야 한다"며 "통일을 추진하기보다는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이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미 관계는 "대체불가능한 동맹이지만 분단과 핵 문제에서 서로 목표가 다르다"며 "무조건 미국 편에 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일 관계는 "소원해지면 양국 모두 손해"라면서 일본이 과거 중국을 의식한 대한(對韓) 정책에서 한국 자체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점을 고려할 때 한미일, 한중일을 묶는 접근으로 더 큰 국가 이익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대중관계는 "한국과 중국은 경제이익과 지역안정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보단 한미 공유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면서 "협력, 공존하면서 견제와 경계를 지속하는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봤다.
이태진 한국역사연구원장 "17세기 소빙기, 총체적 위기론 돌이켜봐야"
이태진 원장은 대한민국의 시급한 과제로 기후변화에 대비한 특별위원회 설치를 꼽았다. 그는 "코로나 팬데믹도 질병학적 관점을 넘어 지구 환경 차원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면서 17세기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할 것을 제언했다. 이어 "1970년대 말 구미역사학계에선 '17세기 총체적 위기론'이, 지리학계에선 '소빙기 이론'이 나왔는데 종합하면 17세기 기온 강하로 농산물 감소가 발생하고 전염병이 만연한 가운데 사회, 정치적 동요가 발생했다는 해석이다"라면서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한 결과 이러한 기온 강하의 원인이 다량의 우주먼지가 지구 대기권에 쌓여 태양의 빛과 열을 차단한 결과라는 설을 뒷받침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 우주먼지와 오늘날 미세먼지의 존재 형태는 같다"면서 "기후재난에 대한 대처가 필요한 오늘날 이 시기 역사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온난화재난을 실체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해나가는 지략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 "대한민국 장애요소는 사회적 합리성 부족"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은 대한민국의 장애 요소로 '사회적 합리성' 부족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사회는 어떤 쟁점이 발생하면 어느 쪽이 옳냐는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한다"면서 "다른 진영의 주장도 동의하고 지지해주는 합리성이 있어야 사회적 합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풀어낼 우선 과제로는 '양극화 줄이기'를 꼽았다. 그는 "노동시장 양극화, 노동생애과정에서 겪는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정부의 조정 역할과 점진적, 단계적 접근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대기업·공공부문 고용은 유연화되고,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보호는 강화하며, 사회안전망은 두꺼워져야 한다"면서 "유연성을 위해서는 감원, 인원 조정보다는 다른 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직업훈련 강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를 향해서는 "탄탄한 기초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면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완화를 위해선 연금·교육·노동 개혁을 한 세트로 보고 헌법기관인 국민경제자문회의를 비롯한 여러 기구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방안을 주문했다.
김도연 전 교과부 장관 "문명전환기에 맞춘 교육개혁 시급히 이뤄야"
김도연 전 과기부 장관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요소로 '교육'을 꼽았다. 그는 "지금 같은 문명전환기에 교육혁신을 1년 게을리하면 향후 몇 배로 인재양성의 타격을 입는다"며 "고등교육도 문제지만 입시문제와 그에 딸린 초중등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래 생각하는 힘을 막는 수능을 바꾸고 △문·이과의 구분을 없앤 뒤 무전공으로 폭넓은 교육을 해야 하며 △교육부의 획일적 대학규제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학 개혁과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서는 나눠먹기식 총장직선제와 대학의 정년 보장을 폐지하고 학부별 정원제도도 없애 학생이 수요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기술계도 분야별로 연구소가 쪼개져 똑같은 일을 하는 낭비를 버리고 리더십의 판단하에 한두 개를 확실히 키우는 전략을 강조했다.
이광형 KAIST 총장 "4차 산업혁명에 맞춘 새로운 인재양성 필요"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고 강조한 점을 상기하고 "그런데 지금 빈부격차와 갈등 때문에 자유가 훼손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성장을 해야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고 결국 갈등이 해소된다"며 "성장은 혁신에서, 혁신은 과학기술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신은 10, 20년 후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면서 "우리의 반도체,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등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더 이상의 성장은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산업을 위해서는 인력 양성과 담대한 연구 지원,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 이 총장은 "4차 산업혁명기 고등교육 역시 새로운 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며 전공 개념을 깨고 기초를 두루 튼튼히 한 다음 전문 분야에서는 스스로 설계하고 공부하는 프로젝트형 교육을 핵심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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