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로 남긴 미발표 원고 출간
죽음 앞둔 격정과 서정의 기록
‘시대의 지성’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다. 지난 2월 영면에 들기 한 달 전(2019~2022년 1월)까지 노트에 남긴 시와 수필, 그림 등 친필 원고가 책으로 나왔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남기지 않은 고인의 유작이다.
김영사는 2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전 장관의 미발표 작품집 ‘눈물 한 방울’을 소개했다. 고인의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도 참석했다. 강 관장은 “노트를 읽다 보면 혼자 저승으로 가야 하는 인간의 외로움이 배어 있다”고 했다.
비단 외로움뿐이랴. 책에는 고인이 죽음을 마주하고 느낀 격정과 서정의 감정이 ‘날 것’ 그대로 펄떡거린다. 어느 날은 “밤이 두려운 까닭은 검은 눈동자만 있고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숨쉬는 코도 없는데 가끔 내 창문을 흔들기도 하고 입도 없는데 나의 내장을 씹는다”고 간암의 고통에 절규하고, 어느 날은 “가야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이나 무슨 무인도 같은 곳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체념과 상실에 빠진다.
또 어떤 날은 “하나님, 제가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까닭은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늦게 가도 용서하소서”라고 생의 의지를 붙잡는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 201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에 대한 그리움도 눌러 담았다. 죽음을 마주한 지성이 느끼는 고독과 허망, 성찰과 깨달음에 옷깃이 여며지는 책이다.
고인은 생전에 컴퓨터를 사용해 집필했다. 마우스를 클릭할 기운조차 없어지자 ‘40년 만에’ 펜을 잡았다고 한다. 펜도 잡기 어려워지자 누워서 녹음을 했다. 항암 치료에 대해선 “글을 쓰는 데 지장이 있다. 남은 기간을 항암 치료를 하면서 보낼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
가족 대신 ‘글’을 택한 고인이 야속하지는 않았을까. 강 관장은 담담한 어투로 “사람이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은 어렵죠. 저희는 고인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결정했고, 그건 우리만의 결정”이라고 했다. “글 쓰는 이는 축복받은 사람이죠. 마지막날까지 내면을, 사유를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라고도 했다.
고인은 문학평론가, 작가,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우리 사회에 지적 자극을 던진 인문학자였다. 195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기성 문단을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라는 강렬한 평론으로 등단한 뒤 언론에도 오래 몸 담았다. 노태우 정부 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어원 창설에 힘썼다.
고세규 김영사 대표는 "올해 1월 영인문학관에서 만난 이 전 장관이 ‘사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만든 노트인데 원하면 책으로 만들어보라’고 했다”고 출판 배경을 설명했다. 노트는 처음엔 정갈한 글씨였으나, 갈수록 힘에 부친 듯 삐뚤빼뚤해졌다고. 출판사는 147편의 시ㆍ수필 중 엄선한 110편과 그림을 책으로 엮었다.
'눈물 한 방울'이라는 제목은 고인이 직접 달았다. 서문에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나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의 끝은 어떨까. 1월 23일 새벽 남긴 마지막 기록.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중략) 나는 그 말을 모른다. 죽음이 죽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