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강석영 작품전
이길이구 갤러리, 30일까지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을 벗어나 샛길에 자리잡은 이길이구 갤러리로 들어서면 흰빛 가득한 지하 공간이 나타난다. 불순물이 없는 백색 점토의 색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도자들로 채워진 전시장이다. 도자들은 색상 뿐만 아니라 조형적 특징을 공유한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어느 지점부터 묘하게 뒤틀리고 찢겨져 나간다. 중앙에 늘어선 둥글고 네모진 기둥들은 수직으로 곧게 뻗어나가다 제풀에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누구 탓이 아니라 자기 무게를 견디지 못한 형상이다. 전통 창호의 격자처럼 무리를 지어서 걸린 정사각형 도판들도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표면이 파헤쳐졌다. 미니멀리즘을 바탕으로 자연을 표현해온 도예가 강석영(73)의 작품이다.
강석영은 물레를 돌리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공업용 기술로 여겨지는 슬립 캐스팅(주입 성형) 기법으로만 작품을 만들어왔다.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1980년대나 귀국해서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이나 한결같다. 이길이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달 30일까지 전시하는 신작들을 비롯해 그리스 아테네의 국제도예올림픽 공원, 미국 브루클린 뮤지엄, 국내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소장한 작품도 모두 캐스팅으로 제작됐다. 지난해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의 외벽에 걸린 4,000여개의 타일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인위적으로 우연성을 유발한 결과물이다. 모순 같지만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첫 단계는 석고를 이용해서 틀을 만들고 안쪽에 백토를 붓는 것이다. 틀에서 떼어낸 원형에 손이나 나무 칼로 변형을 가하는 것이 다음 단계다. 구멍을 뚫거나 자국을 내거나 찌그러뜨리는 식이다. 날카롭게 베여 나간 부분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헤쳐서 흙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품을 건조하고 굽는 과정에서도 변형이 일어난다. 최근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불 속에서 변하는 형태는 예측을 못한다. 이렇게 좀 찌그러져라, 요렇게 깨져라. 그렇게 인위적으로 우연성을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우연성은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원하는 변형을 유도하려면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점토는 제멋대로 수축해버린다. 표면에 기포가 만들어낸 구멍이 남기도 한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흙의 질감을 드러내면서도 표면을 매끄럽고 균일하게 만드는 것도 복잡한 작업이다. 작가가 캐스팅을 고집하는 이유도 뒤틀림 없는 완벽한 원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연성을 추구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이 일부러 꺾거나 뚫으면 선이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하다. 그런데 불 속에서 휘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선은 사람이 흉내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작가는 최근 경기 가평군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혼자서 작업해왔다. 도예가로 4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실험은 계속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과 달리 유약을 사용하거나 평면에 그림을 그린 듯한 작품들도 보인다. 작가는 도예가 용기처럼 실용적 도자기에서 출발했지만 앞으로 더욱 다양한 작품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전에는 물레로 만든 것이 아니면 다 산업적이라고 하면서 작품으로 치지도 않았어요. 도자기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가 ‘야, 그런 걸 갖고 왔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이제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도자기 전시라고 이렇게 테이블에 놓는 것만 있는 게 아니죠. 도자를 소재로 현대 미술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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