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숲 뒤 숨겨진 전쟁의 트라우마]
美軍 한강다리 폭격에 1500명 희생
정수리 파편처럼 여전히 쓰린 상처
"6·25 기억 언급, 속 썩어 문드러져도
우리가 겪은 일 후손에게 꼭 남겨야"
2022년 서울 용산은 가장 ‘핫’한 도시다. 70년 넘게 서울 한복판에 똬리를 틀고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주한미군이 떠나는 자리를 대형 빌딩숲이 차곡차곡 메우고 있다. 재개발 호재에 몰려든 자본세력은 이미 차고 넘친다. 그런데 올 들어 용산의 이름값이 더 껑충 뛰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으로 대통령 집무실이 둥지를 마련한 것. 대한민국 권력지도가 종로에서 용산으로 통째로 옮겨졌다. 바야흐로 정치ㆍ경제의 신(新)1번지로 우뚝 선 셈이다.
그러나 본디 용산은 ‘아픔의 땅’이다. 족히 100년을 그랬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광복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며 내 나라 땅이면서도 쉬이 밟을 수 없던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6ㆍ25전쟁 때는 한강다리에 가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한(恨)도 서려 있다. 젊은이들은 개발 붐에 들떠 있다지만, 용산 구석구석에는 아직 그 시절 몸서리치는 ‘전쟁의 악몽’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6ㆍ25 72주년을 앞두고 20, 21일 그들을 만났다. 대부분 생의 끝자락에 서 있는 전쟁 세대는 1950년 용산을 또렷이 기억해 냈다. 이들이 토해낸 지난날의 고단함은 우리가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땅이 울리던 새벽, 다리가 무너졌다
보광동. 전쟁의 상흔이 배어 있는 ‘마지막 서울 마을’이다.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 가파른 경사길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오래된 가옥 사이로 1955년 정부가 지은 상이용사 주택이 몇 채 눈에 띄었다. 보광시장 뒤편엔 전쟁 직후 동네 주민들이 미군 옷을 빨아주고 돈을 벌었던 빨래터 흔적도 남아 있다.
조점순(87)씨는 대전 피란 시절 1년을 빼고 평생 이곳서 나고 자란 ‘보광동 토박이’다. 전쟁 발발 사흘 뒤 한강다리가 폭파됐다.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군은 북한군 전차가 한강 이남으로 침공하는 걸 막으려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 상판 3개를 끊어버렸다.
“엄청난 폭발 소리가 들리더니 한강물이 솟구치고 땅이 울리더라고. 솜 포대기는 총탄이 못 뚫는다는 얘기를 들어서 이불을 네 조각으로 잘라 가족들끼리 하나씩 뒤집어쓰고는 집 앞 경원선 철길 아래 쌍굴다리로 기어들어갔지.”
긴 새벽을 보내고 아침에 보니 다리는 엿가락처럼 휘어 있었다. 용산민들은 전쟁 하면 누구나 이 사건을 떠올린다. 원효로에서 만난 주운봉(81)씨도 당시 기억을 끄집어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강물엔 시체와 군용차들이 둥둥 떠다녔어. 끔찍해서 두 번은 못 쳐다봤지.”
하늘을 뒤덮은 폭격기... "용산이 불탔다"
다리가 끊어지면서 한강 이북은 오롯이 북한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다. 인민군은 용산에 전쟁 물자와 장비를 죄다 집결시켰다. 그러자 미군이 적의 보급 루트를 막기 위해 공중에서 폭탄을 퍼부었다. ‘용산 대폭격'이라 불리는 7월 16일의 일이다. B-29 폭격기 47대는 이날 하루에만 225㎏짜리 폭탄을 1,504발이나 투하했다.
마음의 병만 얻은 게 아니었다. 원효로1가에 위치한 ‘효원경로당’에서 만난 박윤분(88)ㆍ박영자(81)씨는 폭격 얘기를 꺼내자마자 손사래부터 쳤다. 박윤분씨는 그때 마루에 앉아 있다가 왼쪽 엉덩이와 정수리에 폭탄 파편을 맞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와 엉덩이를 헝겊으로 대충 감싸고 급히 가족과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엉덩이 상처는 딱지가 올라앉을 만하면 바지에 쓸려 진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가 별안간 정수리를 쑥 내밀었다. “여기 만져봐. 뾰족허지? 파편이 아직도 박혀 있다니까. 지금도 누르면 아파.”
박영자씨는 “한강을 지날 때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죽었는데 우린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고 했다. 전쟁 생존자들이 주축이 된 효원경로당 회원들은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들의 원혼이라도 달래주자며 10년 전부터 6월이 되면 한강대교 중간 노들섬 둔치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전쟁 두 글자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기 때문일까. 요즘 경로당 회원들은 생전 나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자주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박영자씨가 “TV를 보니 우리 때랑 똑같다. 우리도 저런 모진 세월을 보냈는데…”라며 말끝을 흐리자, 박윤분씨도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거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그 쓰라림을 알 수가 없다”라고 거들었다.
"축제 때면 동네 떠납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
당시 폭격기들은 정밀한 설비를 갖추지 못해 ‘오폭’이 잦았다. 김태우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쓴 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에 의한 서울 폭격의 목적과 양상’을 보면, 미군 작전분석실은 가로 10m, 세로 200m 크기의 건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같은 장소에 최소 100발의 폭탄을 떨어뜨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가급적 많은 적을 죽이려 물량 공세로 일관한 탓에 민간인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전까지 서울에서 공중폭격으로만 4,250명이 사망했고, 3분의 1이 넘는 1,587명(37.3%)이 용산 주민이었다.
용산에 폭격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는 주민이 많은 까닭이다. 홍차랑(81)ㆍ이홍구(81)씨는 폭격이 집중된 원효로 철도기지 바로 앞에 살았다. 홍씨는 “용산신학교(현 성심여고) 앞에 작은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팔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치료받으려고 병원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고 했고, 이씨는 “폭탄이 떨어진 자리엔 연못만 한 구멍이 생겼고 주변엔 잘린 팔다리가 즐비했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동빙고동에서 만난 남진우(85)씨도 “임시로 만든 한강 고무다리에 매일 송장이 7, 8구씩 걸려 있었다”면서 몸을 떨었다.
그때로부터 반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났건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바짝 긴장하는 것은 예사. 과거 용산 미군기지에서 헬기가 이착륙할 때 보광동 노인들의 혈압이 갑자기 올라가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종종 구급차가 출동하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전까지 매년 가을 한강 불꽃축제가 열리면 피란 가듯 동네를 멀리 떠났다가 축제가 끝나면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불꽃을 보면 폭격 공포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의 이야기는 기록돼야 한다
용산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생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어서다. 조점순씨는 “6ㆍ25 당시 보광동을 기억하는 생존자는 내가 유일하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보광동도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재정비촉진지구(뉴타운)로 지정돼 2년 후면 5,816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원효로 일대 역시 재개발 대상이다.
그래서 ‘그해 여름’ 용산의 필름을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다. 김여정 작가는 그런 일을 한다. 2016년부터 용산지역 전쟁 생존자들의 증언과 역사를 모으고 있다. 김 작가는 “생존 어르신들은 처음엔 전쟁 얘기하기를 꺼리다가도 마음이 진정되면 ‘내 몸이 썩어 문드러져도 우리가 겪은 일들은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며 울분을 토한다”고 했다. 사람도, 공간의 흔적도 없어지기 전에 다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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