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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물안궁’의 구구절절함, 소수자들의 자기 말하기

입력
2022.06.25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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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진짜 나'를 봐달란 요청이 '구구절절'하게 들릴지라도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작가의 '젠더살롱' 연재는 이번 글이 마지막입니다. 귀한 글을 보내주신 이 작가께 감사드립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14일 서울 용산구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탑승해 회현역으로 이동하며 장애인 이동권 및 예산 확보를 위한 오체투지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14일 서울 용산구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탑승해 회현역으로 이동하며 장애인 이동권 및 예산 확보를 위한 오체투지 시위를 하고 있다. 뉴스1


‘쿨’하지 못한 구구절절함

구구절절한 것은 ‘쿨’하지 않다. 구구절절한 것은 불필요한 설명, 자기방어적인 변명, 결론 없는 중언부언들의 특징이다. 이들의 누추한 소란스러움은 시쳇말인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이라는 대꾸로써 가볍게 힐난받는다. 무표정한 ‘안물안궁’ 앞에서 구구절절한 말들은 수신자를 잃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 결과 구구절절한 사람, 또는 구구절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씩 얼굴이 상기된 상태다.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느꼈고 생각한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처럼 쉽게 내팽개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내 삶 속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맥락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물안궁’으로 일축되는 사소하고, 부차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물론 속상한 일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속상함이기도 하다. 왜냐면 이 속상함은 사람과 사람 간에 대화가 있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 사연이 중요한 만큼 그들도 그들 각자의 사연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대원칙을 무시하고 꿋꿋히 구구절절해지는 사람들은 흔히 이기적이라고 간주된다. 그들은 ‘안물안궁’의 모욕이 주는 수치를 앞질러 자신의 삶을, 개별적인 맥락을,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려는 욕심이 더 큰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구절절한 사람이 ‘쿨’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가 그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넘어서 남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해달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구체적 맥락들을 당신도 알아달라고 간청하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함의 이런 속성들은 ‘구질구질’하고, 따라서 ‘쿨’하지 않은 것이 된다.

구구절절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

분명 ‘쿨’하지 못한 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결과로써 증명하기를 요구하는 세상, 그리고 그런 결과가 정당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속삭이는 세상에서 구구절절함은 무가치한 말들의 다발에 불과하다. 더구나 구구절절한 말들은 보통 어떤 결론이나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 구구절절함은 하나의 명료한 주장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영원히 분열하는 자기 모순의 형식이다. 바로 지금 이 글이 그런 것처럼, 구구절절함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를 묻고 따지는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며, 때로는 자비로운 사람들의 인내심조차도 바닥내는 장광설에 불과하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억압의 축을 '구구절절하게'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전혜은, 루인, 도균의 책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퀴어는 모두 단일한가? 정체성은 언제나 분명하고 자명한 정치학인가? 퀴어와 장애의 교차는 어떤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구성하는가? 그리고 어떤 다른 인식론적 태도를 요청하는가?"

교차성 페미니즘은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억압의 축을 '구구절절하게'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전혜은, 루인, 도균의 책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퀴어는 모두 단일한가? 정체성은 언제나 분명하고 자명한 정치학인가? 퀴어와 장애의 교차는 어떤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구성하는가? 그리고 어떤 다른 인식론적 태도를 요청하는가?"

이처럼 구구절절함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해질 수밖에 없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보통 이들은 세상이 짜놓은 ‘평범한’ 각본 아래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이한’ 역할을 맡게 된 사람들이다. 세상은 이들의 경험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는 ‘특이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장애가 있고, 동성 간 친밀한 관계를 맺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트라우마와 폭력 속에서 생존한 이 사람들의 경험이 보편적인 것이 된다면,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특이한’ 역할, 그러나 몇 번 등장하지도 않는 그런 역할에 집어넣는다. 이 역할은 ‘장애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노숙자’, ‘정신병자’, ‘창녀’, ‘난민’으로 끝없이 이어질 주변부 정체성들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 각자의 삶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구구절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만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 ‘특이한’ 역할을 사람들이 마음껏 동정할 수 있도록 말이다. 주변부 정체성들의 삶이 재현되는 방식이 ‘정형화(stereotype)’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들 삶 속에서 복잡하게 교차하는 감정과 경험,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은 이처럼 단일화된 재현 앞에서 모조리 탈락된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나마 자신을 세상이라는 무대에 등장시키고 싶은 소수자들은 일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주어진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구구절절한’ 삶의 맥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포용할 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조립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 휘둘리면서, 그들은 이리저리 구부러진다. 이 구부러짐의 경로 속에서 그들은 항상 처음처럼 구구절절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구구절절해지는 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잃는다.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축복기도를 올렸다가 정직 처분을 받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동환 목사가 13일 응원을 받으며 서울 광화문 감리회 본부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축복기도를 올렸다가 정직 처분을 받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동환 목사가 13일 응원을 받으며 서울 광화문 감리회 본부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잃는다?' 정리해보자. 소수자들은 세상이 정해준 재현 방식에 맞춰 자신을 변용하고 또한 그로부터 탈주하는 경로를 거친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하는 수없이 구구절절해진다. 요컨대 ‘그들이 말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진짜 나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어떤 단어도, 어떤 이미지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미 오염된 것들이다. 따라서 구구절절해질수록, 말이 불어날수록 나는 진짜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구구절절해지는 말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그러니, 세상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 내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구체적인 삶의 맥락들을 가진 나를 제대로 봐달라는 요청은 결국 수신자에게 미처 가 닿기도 전에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패가 단순히 인간적 운명의 비극을 표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대화, 우리라는 관계가 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실패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구구절절함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기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을까? 이 글은 내가 지난 6개월간 연재했던 한국일보의 고정코너, ‘젠더살롱’에 싣는 마지막 글이다. 신문이라는 공적 지면에 연재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내가 좋을 대로 써왔던 것 같다. 이는 물론 내 글을 편집해주시는 기자님들의 노고 덕분이었다. 동시에 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간주되는 ‘부치’, ‘드랙킹’과 같은 ‘고맥락’의 단어들을 설명하길 피하고, ‘안물안궁’의 ‘일기장’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늘어놓기를 선택했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런 단어들이 ‘고맥락’의, 즉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단어들이 아니길 바랐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사적인 것을 가장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이런 방식의 쓰기, 이런 방식의 ‘소수자의 말하기’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서 지나치게 뻔뻔한 것으로 여겨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결국에는 이런 지면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사람들이라면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지?

이런 ‘속사정’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글을 쓰는 누구라도 갖고 있을 테지만, 신문의 귀한 지면을 빌려서 ‘연재 후기’에 해당할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런 고민 속에서, 확고한 입장이라도 있는 ‘척’하는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우연히 공적 지면이라는 공간을 점유했을 뿐인 내 두려움을, 내 치기를, 내 어설픔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킨다면,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통해서만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한번 믿어 달라는 것이다. 나는 소수자로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빌려준 단어를 빌리고 훔쳐서 마치 자기 것인 양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그런 임시 방편에 매 순간 진심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의 ‘구구절절함’은 자주 ‘약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약점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표지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안물안궁’에 불과할 긴 변명을 여기 남겨둔다.

이연숙 작가

이연숙 작가


이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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