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재료공학부는 반도체 관련 학과로 분류된다. 2021년 기준 입학정원은 88명이다. 그런데 88명을 모두 반도체 전공 인재라고 할 순 없다. 이 학부에서 다루는 재료는 반도체가 포함된 전자재료뿐만 아니라 고분자재료, 금속재료, 무기재료, 바이오재료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88명의 입학생 중 어떤 학생을 반도체 전공 인재로 분류할 것인지 명확한 기준은 없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융복합학과도 마찬가지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반도체 관련 특성화 학과는 총 17개인데, 이 중 반도체·디스플레이·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된 곳이 절반인 8곳에 이른다. 나머지 학과들도 디스플레이·홈네트워크·기계부품 등 소분류가 다양하다. 역시 이들 학과의 졸업생을 모두 반도체 전공 인재로 보긴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초 반도체 산업 인재 육성을 지시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정작 주무부처인 교육부는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 현황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한 현황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인력 양성 정책은 공급 과잉으로 이어질 수 있어 자칫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학부 인재 '깜깜이'… 입시학원조차 "학과명에 반도체 없으면 몰라"
20일 정부와 교육계 등에 따르면 교육부가 파악할 수 있는 반도체 관련 인재는 구체적인 전공 분야가 결정된 석·박사급이 전부다. 교육부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관련 학과를 졸업한 석·박사는 2015년 133명, 2018년 135명, 2020년 115명으로 정체 또는 소폭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학부 졸업생의 경우 대기업과 연계된 계약학과를 제외하면 '깜깜이'일 수밖에 없다.
반도체 인력을 배출하는 곳이 다양한 점도 걸림돌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반도체 인재 양성을 담당하는 기관이 교육부 외에도 산업통상자원부, 연구기관 등 다양해 범부처 차원에서 현황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며 "고졸부터 석·박사, 재직자 재교육까지 포함해 검토하고 있지만 현황 파악에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의 반도체 드라이브로 수험생들의 관심도 관련 학과에 쏠리고 있지만, 정작 어느 학과에 진학해야 반도체를 공부할 수 있는지 정보도 부족한 상황이다. 한 입시학원 관계자는 "진학지도를 하는 입장에서도 학부모들이 반도체 관련 학과가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반도체 이름 들어간 것밖에 모른다"며 "대학의 커리큘럼과 교수진의 연구이력을 일일이 찾아보지 않고서는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3학년도 전국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신입생 모집규모는 30개 학과, 1,452명이다. 올해만 8개 학과가 늘었다. 하지만 이 중 7개 계약학과 360명을 제외한 인원들 중 몇 명을 반도체 인재로 봐야할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주먹구구식 인재 양성으로 과잉공급 땐 학생들만 피해"
전문가들은 정확한 현황 파악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정책을 수립할 경우 과거 문제가 됐던 인력 과잉 공급 사태가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닷컴 열풍'으로 컴퓨터공학과 붐이 일었을 때 대학마다 과를 만들었다가 수년 동안 과잉 배출된 졸업생들의 취업문이 오히려 좁아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력 양성 붐에 따라 우후죽순 학과들이 생긴 후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어진 사례는 중국어학과, 사범대, 원자력학과, 해양학과, 항공 관련 학과 등 적지 않다.
송경원 정의당 정책위원은 "인력 양성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부족한 산업 인력이 몇 명인지를 알 수 있다"며 "지금은 협회, 대학, 산업계 등 각자가 부족한 인력 수요를 각자의 기준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주먹구구식으로 몇 명 양성하겠다는 식의 정책을 펼치면 학생들만 과잉공급에 따른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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