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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요리는 화학"...별난 화학자의 유쾌 통쾌한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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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요리는 화학"...별난 화학자의 유쾌 통쾌한 성장기

입력
2022.06.17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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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가머스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
애플TV 8부작 드라마로 제작돼

1950~60년대 미국 과학계를 배경으로 여성 학자가 겪는 성차별을 그려 낸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2022년을 사는 국내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충분하다. 게티이미지뱅크

1950~60년대 미국 과학계를 배경으로 여성 학자가 겪는 성차별을 그려 낸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2022년을 사는 국내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기 충분하다. 게티이미지뱅크

"… 화학은 바로 삶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파이처럼 삶에는 튼튼한 토대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바로 여러분이 그 토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저평가되고 있지요."

철학 강연도 정치 연설도 아니다. 치킨 팟 파이를 만들던 요리 방송 사회자의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식사'의 엘리자베스 조트는 스테이크를 구울 때 고기 근조직을 설명하기 위해 '결합수'와 '자유수'를 언급하기도 하는 별난 사회자다.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이런 엘리자베스의 인생 이야기다.

다윈의 진화론이 밝혀내지 못한 '진화 이전' 분자의 비밀을 연구하는 유능한 화학자지만, 연구소 상사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넌 똑똑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도 버텨야 하는 1950~6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동등한 동료로 인정해 준 캘빈 에번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사고로 떠난다. 이후 비혼모가 되면서 일방적 해고 통보를 받은 엘리자베스는 사별의 아픔과 육아·생계의 부담 등 몰아치는 바람에도 '화학자'라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 투쟁하듯 살아간다. 우연히 시작한 요리 방송에서 화학과 인생을 말하며 인기를 얻지만, 스스로 이는 성공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미국과 영국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뒤늦게 소설가의 꿈을 이룬 보니 가머스(65)는 데뷔작 '레슨 인 케미스트리'에 자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차별 사례들을 녹여냈다. ⓒ세레나 볼튼. 다산책방 제공

미국과 영국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뒤늦게 소설가의 꿈을 이룬 보니 가머스(65)는 데뷔작 '레슨 인 케미스트리'에 자신이 회사에서 겪었던 차별 사례들을 녹여냈다. ⓒ세레나 볼튼. 다산책방 제공

평생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뒤늦게 이 작품으로 데뷔한 보니 가머스(65)의 문장은 무엇보다 읽기 편하다. 역경과 성장의 기승전결이 뚜렷한, 어쩌면 진부할 수 있는 구조가 안정감을 준다. 화학자가 요리 방송을 한다는 독특한 설정에, 요리야말로 "새 에너지를 창조하고 새 세대를 번성시키는 진지한 화학 실험"이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괴짜 같은 주인공 캐릭터도 흥미롭다.

애플TV가 이 작품을 8부작 드라마로 제작하는 것도 이런 편안함과 유쾌함 때문일 터다. 올해 4월 영국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되기 전 202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원고가 공개된 지 2주 만에 22개국에 번역 판권이 수출됐고, 이후 애플TV와의 계약도 체결됐다. 1950년대 여자 화장실도 없는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 연구소 건물에서 일하며 편견에 맞선 흑인 여성들을 담은 영화 ‘히든 피겨스’(2016)의 문제의식에, 저널리스트 지망생이 패션계에 입문해 우여곡절을 겪고 제자리를 되찾는 성장담을 속도감 있게 그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구조를 닮았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플TV 올해의 인기작인 '파친코'처럼 최근 주목받는 여성 중심 미시사(微視史) 소설의 느낌도 풍긴다.

브리 라슨은 현재 애플TV가 제작 중인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원작으로 한 8부작 드라마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주연 배우다. 2019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홍보를 위해 내한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브리 라슨은 현재 애플TV가 제작 중인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원작으로 한 8부작 드라마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주연 배우다. 2019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홍보를 위해 내한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야기의 보편성은 폭넓은 공감의 바탕이다. 출산, 육아,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한 대목은 1950년대 미국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일반적인 주부는 전혀 평범한 존재가 아닙니다." 엘리자베스의 이 발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에서 서울대 공대, 연극영화과 출신 엄마들이 수학문제를 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줄 때만 전공을 살린다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장면도 떠오르게 한다.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많기에 '82년생 김지영'이 해외 10개 언어권에서 30만 권 이상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을 터다.

엘리자베스가 겪는 각종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성폭행을 시도한 지도교수에게 반격한 죄(?)로 미국 캘리포니아대(UCLA) 박사학위 과정에서 쫓겨나고, 연구소 상사에게 자신이 연구한 논문을 뺏기고, 비혼모라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당하는 일. 이 모두가 사실 과학계가 아니라도, 2022년 지금도 벌어지는 일들이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보니 가머스 지음·심연희 옮김·다산책방 발행·1권 352쪽· 2권 288쪽. 각 1만5,800원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보니 가머스 지음·심연희 옮김·다산책방 발행·1권 352쪽· 2권 288쪽. 각 1만5,800원

물론 씁쓸함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고집은 통쾌함을 선사하고 연대의 힘은 감동을 남긴다. "가족이란 생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 엘리자베스는 가부장적 남편과 결혼 생활을 하는 해리엇, 지도교수의 성폭행 범죄로 박사학위가 좌절됐던 인사과 직원 프래스코는 물론, 가부장적·혈연중심적 사회구조에서 상처받은 남성들과도 손잡아 일종의 가족이 된다.

환갑 넘은 인생 선배로서 저자가 독자에게 보내는 듯한 메시지는 이렇다.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오늘 집에 가시면 본인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시작하십시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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