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설계 기술만 팔아 조 단위 매출 올려
전 세계 스마트폰 95%가 ARM 기술 의존
매물 나오자 인텔·퀄컴·SK 군침...삼성도 '참전' 하나
반독점 규제 피하기 위해 '컨소시엄' 구성할 듯
'누구나 갖고 싶지만, 아무도 살 수 없는 회사.'
영국 반도체 회사 ARM을 부르는 말입니다. 이런 ARM이 다시 매물로 나오면서 전 세계 반도체 업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2016년 36조 원에 ARM을 인수(M&A) 했던 소프트뱅크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ARM을 상장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프트뱅크는 2년 전에도 ARM을 엔비디아에 매각하려다가 결국 올 2월 좌절을 맛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퀄컴, SK하이닉스, 인텔에 이어 삼성전자까지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공동으로 ARM을 인수할 수 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ARM이 어떤 회사길래 최고의 반도체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드는 걸까요
'팹리스의 팹리스'...애플, 삼성, 퀄컴도 의존
ARM은 1990년 설립된 영국의 반도체 설계회사입니다. 하지만 보통 반도체 회사와는 기업 운영 방식이 매우 달라요. ARM은 퀄컴처럼 제품을 설계해 만들어 판매하거나, TSMC처럼 주문을 받은 반도체를 만들어 납품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반도체 설계회사(팹리스)에 연산을 담당하는 중앙처리장치(CPU) 프로세서의 설계구조(아키텍처)만 판매해 로열티를 받는 구조인데요. 삼성전자, 퀄컴, 애플, 엔비디아 등 대부분의 반도체 회사들이 ARM의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자기만의 프로세서를 만든다고 보면 됩니다. 프로세서를 피자로 예를 들자면, 각 반도체 업체들은 ARM으로부터 피자 도우(아키텍처)를 납품받고, 각자가 그 위에 자신만의 토핑(설계 기술)을 접목해 제품을 완성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에 혹자는 ARM을 '팹리스의 팹리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①ARM은 원래 1978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설립된 PC 제조업체 '아콘(Acorn) 컴퓨터' 안에 있던 독립된 팀이었습니다. '영국의 애플'로 불린 아콘컴퓨터는 영국 전체 학교의 80%에 설치되는 등 잘나가는 토종 PC업체였는데요. 하지만 ②1980년대 컴퓨터 제조회사 IBM이 인텔 CPU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OS) DOS를 이용한 호환 PC를 내놓으면서 아콘 컴퓨터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에 ③아콘컴퓨터는 새로운 아키텍처를 개발하는데요. 작고 저렴하면서도 괜찮은 성능을 특징으로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④결국 PC 시장의 승자는 'IBM-인텔-윈도 연합'이 되었습니다.
작고, 저렴, 저전력의 기술...스마트폰 시대 꽃피워
아콘컴퓨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따로 떨어져 나온 ARM은 작고, 저렴하면서 낮은 전력으로 구동할 수 있는 CPU를 만든다는 소신을 지켰습니다. 당연히 PC에 들어가는 CPU보다는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에 게임기, 셋톱박스, PDA로 명맥을 이어나갑니다.
그러다가 휴대폰 시대를 맞이하면서 ARM은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그동안 PC CPU 시장을 주도했던 인텔의 'X86' 아키텍처가 명령어가 다양하고 길이도 변동성이 커 한 번에 많은 연산을 처리하는 반면, ARM은 명령어 길이가 한정되고 훨씬 단순합니다. 이에 ①X86은 복잡한 작업을 할 수 있지만 속도가 느리고 전력 소모가 크지만, ②ARM은 간단한 작업을 많이하면서도 빠르고 전력 소모량이 적습니다. 게다가 ARM은 회로 구조도 단순해 가격도 저렴하고 크기도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크기가 작은 모바일 기기에 최적화된 셈이죠.
1994년 미국의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가 ARM 설계 기반의 반도체를 만들어 노키아에 팔면서 ARM의 이름이 업계에 다시 알려졌습니다. 애플은 2001년 에어팟을 개발하면서 ARM의 기술을 활용했어요.
2010년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면서 ARM 아키텍처는 주류가 됐습니다. 스마트폰은 PC와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PC처럼 열을 빼낼 수 있는 냉각팬을 별도로 갖출 수 없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저전력의 ARM 아키텍처는 애플, 삼성전자, 퀄컴 등 모든 스마트폰 업체로부터 선택을 받습니다. 현재 전 세계 스마트폰의 95% 이상이 ARM 기반의 프로세서를 활용한다고 합니다. 인텔도 스마트폰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기 위해 X86 기반 모바일용 프로세서를 내놓긴 했지만, 모바일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보니 결국 시장에서 외면받았어요.
사물인터넷 시장 주목한 소프트뱅크, 36조원에 인수
일본의 IT기업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일찍부터 ARM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앞으로 모든 사물에 반도체가 들어가는 사물인터넷(IoT) 시장이 올 것으로 판단하고, ARM 기술의 활용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이에 손 회장은 2016년 7월 알리바바와 슈퍼셀 등 알짜 회사의 지분을 매각하면서 마련한 실탄으로 ARM 인수를 선언했습니다. 매출 2조 원짜리 회사에 234억 파운드(약 36조 원)를 베팅한 것입니다.
소프트뱅크는 ARM이 더 많은 매출을 낼 수 있도록 자체 반도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ARM은 아키텍처 기술만 제공하겠다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기존 사업모델을 고수했습니다. 양사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프트뱅크가 위워크 등 잇단 투자 실패로 자금난에 휩싸이면서 ARM 지분을 팔기로 결정해요.
엔비디아, 인수 시도했지만 '반독점 규제'에 막혀
이때 등장한 기업이 미국의 그래픽카드(GPU) 업체 엔비디아입니다. 엔비디아는 구글 알파고 이후 전 세계에 인공지능(AI) 붐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알파고가 바둑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데, 인텔의 CPU와 함께 엔비디아의 GPU가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GPU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가 ARM까지 확보한다면 프로세서 분야 생태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죠. 특히 엔비디아는 ARM의 기술을 활용해 데이터센터 서버용 칩을 개발한다는 목표도 세웠습니다. 엔비디아는 인텔이 장악한 서버용 CPU 시장에서 영향력 확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요.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러나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면 AI 생태계에서 한 기업이 사실상 독점할 수 있을 만큼 좌지우지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AI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분야가 되면서 주요 나라들 역시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반발했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대규모 인수 합병을 추진할 경우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들로부터 반독점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요. 한 국가라도 거부할 경우 인수 합병은 물건너 갑니다. 특정 기업이 시장을 독점할 수 없도록 각 나라 반독점 당국의 허가절차를 밟도록 '견제 장치'를 마련한 것인데요.
엔비디아의 ARM 인수 역시 미국을 비롯해 영국, 유럽연합(EU)의 관계 기관이 모두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최종 결렬됐습니다. 여기에는 인텔, 삼성전자, AMD, 퀄컴 등 주요 기업들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특히 이들은 엔비디아가 ARM 인수 후 경쟁사에 ARM의 아키텍처를 공급하지 않을 수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시 인수 시도를 두고 "ARM이 엔비디아에 인수된 이상 반도체 산업의 '스위스(중립국)'라는 명성이 훼손될 것"이라며 싸늘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요.
다시 매물로 나온 ARM...초대형 컨소시엄 구성될까
결국 소프트뱅크는 2월 엔비디아와 ARM 매각 협상을 멈춘 이후 내년 3월 말까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ARM을 상장하는 방안을 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2016년 ARM 인수 당시 투자한 320억 달러를 회수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여러 기업들이 다시 ARM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요.
다만 이들은 엔비디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컨소시엄'이란 카드를 꺼냈습니다. 포문은 ARM에 쓴맛을 본 라이벌 인텔이 열었습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월 말 "업계 컨소시엄을 구성해 ARM 지분을 인수하는 건을 지원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는데요. 이어 3월 말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역시 주주총회에서 "여러 국가 업체와 공동 컨소시엄을 꾸려 ARM 지분 확보를 통해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데 이어 최근 퀄컴도 컨소시엄 구성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서 "ARM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며 우리 업계의 개발 과정에서 필수 요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도 ARM 인수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데요. 시장조사업체 엔드포인트 테크놀로지스 어소시에이트의 로저 케이(Roger Kay)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팻 겔싱어 인텔 CEO가 최근 만났는데 당시 ARM 컨소시엄 인수를 얘기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삼성전자가 그동안 여러 차례 대형 인수합병(M&A)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상태에서 이 부회장이 7일 떠난 유럽 출장에서 ARM 인수를 논의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있어요.
반도체 M&A 장벽 높아져...중국 반대 예상
이들이 공동으로 ARM 인수에 나서는 이유는 여러 국적의 회사가 함께 나설 경우 반독점 규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특정 회사가 ARM을 품게 될 위험도 줄일 수 있습니다. 다만 컨소시엄 형태로 인수하는 만큼 ARM의 독점적 기술을 특정 회사가 가져가거나, 기업 사이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공동 투자 형식으로 ARM에 지분 투자를 할 경우 ARM 자산을 보다 안정적이면서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엔비디아가 인수하려고 했을 때와 비교하면 반대 목소리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다만 ARM 인수를 위해 컨소시엄을 결성한다고 해서 실제 인수에 성공할지는 불투명하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최근 반도체 기술이 국가 안보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면서 반도체 업계의 대규모 인수합병에 대한 장벽이 높아졌기 때문이에요. 특히 미국과 우방국 기업들끼리 컨소시엄을 꾸릴 경우 중국이 딴지를 걸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예상도 가능합니다. 실제 2018년 퀄컴이 네덜란드 자동차 반도체 업체 NXP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중국은 인수 심사를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결국 M&A를 무산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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