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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가서도 천사들의 조직을 만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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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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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vashi Vaid(1958.10.8~ 2022.5.14)

우르바시 바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 역사의 전무후무한 조직운동가로 불렸다. 인도계 이민자 출신 레즈비언 변호사인 그는 페미니즘 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교차성' 개념을 생경해하던 시절부터 젠더와 인종, 민족, 빈부 등 이슈 별 대중을 조직화하고 단체간 연대를 추구하며, 운동을 확장했다. 기민한 선동-홍보 감각과 현장 활동가의 전투력, 조직가의 친화력을 겸비한 그는 게이 부문운동을 넘어 진보운동 전반의 발전에 기여했다. 레즈비언 방송인 로라 플랜더스의 'Laura Flanders Show'에 출연한 2014년의 바드. 위키피디아.

1980년대 에이즈와 지금의 에이즈는 같은 질병이 아니다. 80년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 치사율은 50%에 육박했고, 20년 전만 해도 감염자 평균 생존율은 약 10년이었다. 1996년 항레트로바이러스 복합요법이 등장하면서 근년의 HIV 감염자 생존율은 잘만 관리하면 비감염자와 별 차이가 없다.
내일이 없는 공포, 하루하루 연인-친구를 잃는 상실감-고립감, 더 그악스러워진 차별과 배척을 감당해야 했던 발병 초기 동성애자의 삶은, 뉴욕 홈리스 에이즈 환자 보호시설인 '베일리 하우스'를 운영한 지나 콰트로키의 사연으로 일부 살펴본 적이 있다. 대도시 당국과 주-연방 정부마저 우왕좌왕 감염자를 격리하는 데 급급해 질병 예방 홍보조차 안 하고 연구 예산 책정에도 미온적이었던 사실, 급기야 소수의 게이 인권운동가들이 질병 정보를 커뮤니티에 직접 알리며 정부 당국을 상대로 그야말로 분노에 차서 투쟁해야 했던 사정도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했다.

당시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에이즈가 발병한 지 만 4년이 지난 85년 9월에야 공식 석상에서 에이즈를 처음 언급했고, 후임인 조지 H. W. 부시도 취임 1년여가 지난 90년 3월에야 한 에이즈 관련 학회에 참석해 환자들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부시는 “여러분들처럼 바버라와 내게도 에이즈로 숨진 친구들이 있다”며 질병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에이즈 환자 차별에 반대하는 법안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의 연설은 하지만 한 청중의 분노 어린 성토로 여러 차례 중단됐다. ‘값싼 말 대신 예산을 배정하라(Talk Is Cheap, AIDS Funding Is Not)’는 문구의 피켓을 든 그 여성이 바로 미국 최대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전미 게이-레즈비언 태스크포스(이하 TF)’ 사무국장이던 만 31세의 우르바시 바드(Urvashi Vaid)였다. 바드는 보안요원에 의해 쫓겨났지만, 그의 시위는 AP 사진 등을 통해 미국 사회에 알려졌고 단체에는 후원금이 쇄도했다.

대통령 조지 W.H. 부시가 취임 1년여 만에 공개 연설을 통해 에이즈 환자를 언급한 90년, 행사장에서 피켓 시위로 연방 정부의 환자 차별과 냉대를 성토한 전미 게이레즈비언태스크포스 사무국장 우라비시 바드. 피켓 뒷면에는 '에이즈에 걸린 게이들을 기억하라(Remember Gay People with AIDS)'를 문구가 적혀 있었다. AP 연합뉴스

그해 말 부시는 여러 보건 인권단체 대표들을 백악관에 불러놓고 에이즈 환자 차별 등 ‘호모포비아’를 혐오범죄로 규정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TF와 바드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FBI는 법 1주년 기념 행사에 바드를 초대해 윌리엄 세션스 당시 FBI 국장과 나란히 기념촬영까지 했다. 직후 인터뷰에서 바드는 “아마 에드거 후버가 무덤 속에서 돌아누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계 이민 여성 성소수자인 바드는, 페미니즘 활동가들조차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란 용어를 낯설어하던 시절부터 교차성 문제- 젠더, 성정체성, 인종, 가난 등- 에 천착한 선구적 활동가였다. 그가 쉼없이 새로운 단체를 꾸리고, 동지를 규합하고, 단체들의 연대를 추구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미국 게이 인권운동 역사상 전무후무한 조직운동가”였다.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성소수자 차별에 맞선 그였지만, 그가 더 간절히 원한 건 성(정체성)을 넘어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였다. 그는 성소수자가 선봉에 서서 그 변화를 이끌어야 하고,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우르바시 바드가 5월 14일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3세.

동성간 성행위를 규제-처벌한 일명 '소도미(sodomy) 법' 폐지 촉구 시위 현장의 바드(사진 아래). 미국 소도미법은 2003년 6월 연방대법원 판결(Lawrence v. Texas)로 최종적으로 폐지됐다. 태스크포스 사진.

바드는 영문학자 아버지와 시인 겸 화가 어머니의 세 딸 중 막내로 1958년 10월 8일 인도 뉴델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뉴욕주립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8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배서(Vassar) 칼리지에서 정치학과 영문학을 전공(79년 졸)하고 82년 노스웨스턴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됐다.

두툼한 근시 안경에 인도 억양 말투, 머리카락도 인도식으로 허리까지 땋고 다녔다는 그는 자칭 “아웃사이더 괴짜 소녀”였고, “만 12세 무렵 부모님 서재의 모든 책을 섭렵”했을 만큼 독서광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조숙해서 이민 첫 해부터 침대 머리맡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포스터를 붙여둘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1살 무렵 반전 행진에 동참했고 12세 땐 반전 공약으로 리처드 닉슨에 맞선 민주당 대선 후보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지지 연설을 했다고 한다.

에너지는 대학서 폭발했다. 갓 남녀공학으로 전환한 배서 칼리지가 우수 남학생을 받기 위해 차별적인 특전을 제공하자 바드는 ‘페미니스트 유니언’이란 조직을 만들어 대학측에 맞섰다. 재단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투자를 성토하는 시위도 벌였다. 바드의 대학 동기로 훗날 유엔에서 일한 수전 앨리(Susan Allee)는 “우리는 가짜 관까지 메고 반아파르트헤이트 시위와 행진을 벌였다”고 회고했다.

로스쿨 졸업 후 바드는 첫 직장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상근 변호사로서 연방교도소 운영 시스템 개선을 위한 집단소송에 가담했고, HIV 감염 재소자 인권을 위한 84년의 ‘교정 개혁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85년 TF 이사회에 합류해 이듬해 그가 맡은 일은 그의 제안으로 신설된 ‘대중 홍보국’의 국장, 즉 대변인이었다. 인권시민운동 조직으로선 처음 미디어 홍보를 전담-전문화한 시도였다. 만 3년(89~92년)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며 그는 TF의 예산 및 조직 규모를 3배나 키웠다. 90년 시작해 올해로 만 33년 된 ‘크리에이팅 체인지(Creating Change) 컨퍼런스’는 지금도 미국 유일의 성소수자 의제 전국 정치 포럼으로 자리 잡았다. 바드는 92년 TF를 떠나 첫 책 ‘가상 평등(Virtual Equality)’을 썼고, 95년 책 출간 직후 다시 복귀해 말년까지 TF 정책위원회 일을 거들었다. 그가 평생 간여해온 이슈는 성소수자 빈곤 문제에서부터 교정 정의, 진보 종교인 조직화 등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다. 그러면서 컬럼비아대와 뉴욕시립대 로스쿨과 함께 게이 및 젠더 이슈에 대한 법률 및 사회현실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포드재단(2001~05)과 성소수자 연구 최대 지원 재단인 길재단(GILL)재단(04~14) 이사로도 활동했다. 2012년에는 테니스 스타 빌리 진 킹, 배우 제인 린치, 시카고 컵스 공동 소유주 로라 리케츠 등과 함께 미국 최초 레즈비언 정치인 선거운동 후원 조직(Super PAC)인 ‘LPAC’을 구성, 그 해 미국 최초 동성애자 상원의원이 된 태미 볼드윈(Tammy Baldwin, 위스콘신 민주당) 등을 지원했다. 말년의 그는 인종 젠더 경제 정의 및 불평등 이슈를 연구하고 관련 진보단체의 활동 전략과 조직화를 돕는 비영리 컨설팅그룹인 ‘바드 그룹’을 설립해 운영했다.

"우리가 획득한 자유는 불완전하고, 조건적이며,
언제든 다시 빼앗길 수 있는 자유다."

우르바시 바드, 1995년 책 'Virtual Equality'에서.

그는 거친 활동가였다. 부시의 연설을 저지하다 연행된 이듬해 새크라멘토 주지사(Pete Wilson)가 주정부의 고용 및 주거평등법 적용 대상 항목에 성지향을 포함시키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맨 먼저 의사당 앞 시위를 조직한 것도 그였고, 동성애자 헌혈을 범죄로 규정하려던 캘리포니아 공화당 하원의원(William Dannemeyer)을 가장 못살게 군 것도 그였다. 그는 “우리를 ‘revolting(역겨운)’하다고 말하는 다네마이어 같은 편협한 자들을 쳐부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라며 “리볼팅? 좋아, 리볼팅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1993년 D.C 게이 인권행진 단상에서는 100만 청중을 향해 “나는 오늘 아름다움과 힘을 동시에 보았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알던 세계의 종말을 촉구한다. 지금까지 알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폭력과 차별과 호모포비아의 종말을 촉구한다. 지금 우리는 지금까지 알지 못한 자유를 위해 여기 모였고,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 웅변했다.

조직가로서 바드는 한없이 나긋나긋했다. 작가 마크 해리스(Mark Harris)가 추도문에 썼듯이 그는 “거리의 구경꾼들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하듯, 백만장자들과도 나란히 앉아 그들을 설득할수 있는 사람”이었고, 동성애자 인권운동가 리처드 번스(Richard Burns)의 말처럼 “아첨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자아도취형 권력자들까지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능력자”였다. 번스는 “[그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의견을 전달하면서도 상대로 하여금 모험에 동참하는 듯한 흥미를 갖게 하곤 했다”며, 그렇게 그의 주변으로 사람을 몰려드는 과정을 보면 “마치 레즈비언 세포가 분열하는 듯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에이즈 환자를 위한 전투적 운동단체인 ‘액트업(Act Up)’의 설립자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 1935~2020)는, 80년대의 격한 상황 탓도 있겠지만 성정도 워낙 거세고 드세서 자기가 만든 단체(‘Gay Men’s Health Crisis’)에서 동료들에 의해 축출당한 적도 있는,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자면 ‘미국서 가장 값진 말썽쟁이 중 한 명’이었다.

그 ‘싸움꾼’ 크레이머가 1994년 바드와 교차성-연대 이슈를 두고 언쟁을 벌이다 꼬리 내린 일화가 있다. “만일 우리가 HIV 치료 이슈를 인종주의와 연결지어 본다고 칩시다. 거기서 곧장 (백인인)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갈라질 것입니다. 임신-낙태 이슈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또 어떤가요. 직접적으로 자기들 문제도 아닌 임신-낙태 이슈에 남성이 여성과 연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출산 자유의 문제를 넘어 국가 권력이 개인의 성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그 이슈를 외면한다면, 국가가 남색 행위를 금지하는 것도 용인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드의 말에 크레이머는 “솔직히 그렇게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MSNBC 저명 앵커 레이철 매도(Rachel Maddow)가 바드를 게이인권운동 등 부문 운동을 넘어 미국 진보운동 전반의 변화-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라 평한 건 아마 저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바드는 “해방에 대한 나의 이해는 함께 일한 페미니스트나 게이 활동가들이 아니라 식민 지배와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청년 시절) 저항운동에서 비롯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슈퍼팩을 만들어 성소수자 정치인을 지원해온 것도 “우선은 평범한 시민, 성소수자와 유색인 등 약자를 위한 신선한 정치를 원해서이지만, 더 나아가 그 도전적 문제들을 레즈비언이 주도적으로 풀어야 하고 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첫 책 ‘가상 평등’은 법-제도적 진전이나 정치인의 레토릭으로 호도-은폐되는, 온존하는 일상-문화 차원의 소수자 차별과 폭력, 축적된 차별의 결과인 가난과 소외의 현실을 환기한 책이다. 또 가시화한 작은 성취에 안주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불의를 향한 투쟁의 근육을 더욱 긴장시켜야 한다고 진영 내부에 촉구한 책이기도 하다. 그는 양성 사회가 인정하는 LGBTQ, 즉 주류사회가 ‘관용’으로 품어준 덕에 소수자도 주류화(mainstreaming)하는 운동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실현 가능한 구조와 문화의 변화, 모두가 온전히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운동의 궁극적 목표여야 한다고, 그것이 활동가의 윤리적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대중매체가 퀴어의 존재를 점차 긍정하며 수용하던 운동 초기의 고무적 분위기에 그가 끼얹은 저 ‘찬물’은 진영 내부에서조차 즉각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암 투병 중이던 만년의 우르바시 바드(앞)와 케이트 클린턴 부부. 둘은 메사추세츠 케이프 코드의 끝마을인 저 곳 프로빈스타운에 거주하며 뉴욕을 오갔다. 마이클 커닝햄이 '아웃사이더들의 낙원'이라 했던 곳이다. 페이스북, losangelesblade.com

그는 88년 시사 코미디언 케이트 클린턴(Kate Clinton, 1947~ )를 만나 파트너로 지내다 25주년인 2013년 결혼했고, 게이들의 성지로 불리는 프로빈스타운과 뉴욕-보스턴을 오가며 해로했다. 그들 부부가 활동가 및 지인들과 20년 넘게 이어온 독서클럽, 바드가 인도 음식을 요리해 지인들을 초대해 나누던 디너파티는 대륙 반대편 서부 지역 활동가들까지 열일 제쳐두고 참석하곤 했던 전설적 모임이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모임은 ‘Lez Hang Out’이란 이름의 줌 파티로 이어졌다.

바드는 2005년 갑상선암, 15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20년 유방암을 전이된 상태로 다시 진단받았다. 그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누가 어떤 도움을 주었고, 무슨 맛난 걸 선물했고, 병원에선 어떤 치료를 받았고, 의사는 어떻게 말했고, 지금 그의 상태는 어떠하고 등등을 시시콜콜히 공유했다. 또 누가 언제 어떤 질병에 걸려 도움이 필요하면, 이렇게 다들 서로 돕고 기대자는 일종의 ‘조직화’인 셈이었다. 바드는 숨지기 한 달 전까지 미국 ‘LGBTQ+ 여성 커뮤니티 실태 조사’를 챙겼고, 번스가 의장인 ‘미국 LGBTQ+ 박물관(2025년 개관 예정) 건립 추진 위원회’ 일을 거들었다.

힌두교 신자인 그의 장례식은 오랜 친구인 유대교 랍비 샤론 클라인바움이 맡았다. 가까운 이들만 모여 조촐히 치러졌다는 장례식에서 친구들은 ‘Fxxx Cancer’ ‘Fxxx the Supreme Court!’등을 연호했고, 패티 스미스의 노래 ‘People Have the Power’를 고별송으로 합창했다. 오랜 친구인 LA LGBT센터 CEO 로리 진(Lorri L. Jean)은 “만일 천국이 있다면, 우르브(Urv)는 이미 천사들을 조직화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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