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데모 그만하라고 보낸 군대서 동생이 죽었다"... 최우혁씨 가족의 비극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데모 그만하라고 보낸 군대서 동생이 죽었다"... 최우혁씨 가족의 비극

입력
2022.06.10 04:30
23면
0 0

최우혁씨, 1987년 9월 군 입대 뒤 의문사
"군대 가면 죽습니다"라며 입대 거부했지만
5개월 만에 불탄 시신으로... 가혹행위 의심
"내가 아들 죽였다"며 어머니도 극단적 선택

1987년 9월 최우혁씨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최종순씨 제공

1987년 9월 최우혁씨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최종순씨 제공

"정오쯤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어요. 우혁이가 잘못됐다고. 두 시간 달려 양주로 가보니, 창고처럼 형편없는 군 병원 영안실에 새까맣게 그을린 시신이 있더라고요. 그게 우혁이였어요."

6·10민주항쟁 35주년을 앞둔 8일 경기 성남시 카페에서 만난 최종순(65)씨는 35년이 흐른 지금도 동생 우혁씨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우혁씨는 1987년 9월 8일 21세에 부대에서 분신했다.

그날 이후 가족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인 우혁씨를 사지로 내몰았다며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버지는 5년 전 세상을 등질 때까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30여 년간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에 매진했다. 이젠 최씨가 아버지를 대신해 유가협 의문사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종순씨가 8일 경기 성남시 카페에서 동생 우혁씨의 의문사 관련 자료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최종순씨가 8일 경기 성남시 카페에서 동생 우혁씨의 의문사 관련 자료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잦은 체포·부상에... 부모님 "데모 그만하고 군대 가라"

우혁씨는 1966년 3월, 3남 1녀의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뒤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찰에 체포되는 건 일상이었다. 최루탄에 발을 맞아 새끼발가락이 짓이겨지거나, 전경버스 안으로 끌려가 집단구타를 당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우혁씨가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 최종순씨 제공

고등학생이던 우혁씨가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 최종순씨 제공

막내아들 걱정에 부모가 칼을 빼들었다. 시위 참여를 막기 위해 군대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운동권 병사에 대한 가혹행위를 알고 있던 우혁씨는 "군대 가면 죽습니다"라며 저항했지만, 부모는 등록금을 주지 않으며 맞섰다. 결국 우혁씨는 1987년 4월 양주의 20사단 60여단에 입대했다.

군 "개인적 사유로 극단적 선택" 발표했지만…

부모 바람과는 달리, 막내아들은 입대 5개월 만에 불탄 시신으로 돌아왔다. 유가족과 친구들은 가혹 행위를 의심했다. 우혁씨가 보안대에 불려가 조사받은 정황도 드러났다.

우혁씨가 1987년 6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최종순씨 제공

우혁씨가 1987년 6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최종순씨 제공

하지만 군은 개인적 문제로 우혁씨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발표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누나가 외국인과 결혼한 점 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최종순씨는 "아버지 사업은 그냥 정리한 것이고, 여동생은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반박했다. 군에서 최씨의 시신을 주지 않아, 유가족과 친구들은 빈 관을 든 채 장례를 치러야 했다.

"내가 아들 죽였다"... 어머니도 우혁씨 뒤따라

가족들은 슬픔에 빠졌다. 특히 아들의 입대를 강하게 주장했던 어머니는 "내가 우혁이를 죽였다"며 충격이 가장 컸다. 최씨는 "어머니는 웃음을 아예 잃어버리고, 손주가 태어나도 반기지 못하셨다"고 회상했다. 고혈압, 뇌출혈로 한 쪽 눈을 실명하기도 했다. 자책하던 어머니는 결국 1991년 2월 한강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1987년 9월 최 열사의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오열하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다. 최씨 제공

1987년 9월 최 열사의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오열하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다. 최씨 제공

막내아들을 잃고 아내까지 떠나보냈지만, 아버지 최봉규씨는 진상규명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의 결과 2004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극단적 선택의 원인은 보안대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군이 운동권 동료들을 감시하는 프락치 활동을 요구하자, 배신과 가혹행위 모두 견딜 수 없던 최 열사가 분신했단 것이다. 다만 위원회는 "군이 정보 제공을 하지 않고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물증 찾기 어려워… 양심선언이 유일한 희망

최종순씨는 지난해 3월 진실화해위원회에 다시 진정을 넣었다. 보안대와 우혁씨 죽음 사이의 연관성을 확실하게 밝혀달라는 취지였다. 최씨는 "군이 물증을 다 없앴을 것"이라며 "보안대에 있던 군인들의 양심선언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1978년 초등학교 졸업장을 들고 있는 우혁씨. 최종순씨 제공

1978년 초등학교 졸업장을 들고 있는 우혁씨. 최종순씨 제공

최씨는 대화 내내 동생을 군대에 보내기로 한 가족들의 선택을 자책했다. "뜻대로 살 수 있었는데, 우리가 억지로 틀어버린 거잖아요. 학생운동을 계속했다면 감옥살이를 했더라도 살아는 있었을 텐데…"

최씨는 우혁씨가 민주유공자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는 "우혁이는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국가폭력에 의해서 죽었다"며 "동생에 대한 최소한의 명예회복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직접 제보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며, 진실한 취재로 보답하겠습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