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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이름의 물고기

입력
2022.06.09 20:00
수정
2022.06.10 16:02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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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 발견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몸속에는 물고기가 산다. 이 물고기의 크기는 너비 0.2㎛, 길이 1㎛로 미토콘드리아보다 작으며, 그 개체 수 또한 적기 때문에 그동안 과학자들은 이 전설 속 물고기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당신의 혈관 속을 헤엄치는 이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물고기가 당신의 몸안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이 물고기는 혈액 속에서 빠른 속도로 유영하기 위해 방추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측면에는 지느러미와 혈액의 속도, 압력 등을 감지하기 위한 옆줄이 발달되어 있다. 체색 또한 이 물고기의 특징인데, 보통은 투명색을 유지하지만, 특정 시점에서는 자신이 처한 환경의 배경 색과 정반대의 빛깔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물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지만 오래전 우연한 기회에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과 사이좋게 공생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는 설이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아무튼 이 물고기에게 인간의 몸은 일종의 바다인 셈인데, 그 거대한 바다의 여러 구역 중에서 이 물고기는 주로 뇌, 특히 대뇌피질과 시상하부, 그리고 심장에 분포한다. 이러한 서식지 분포는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 물고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자유'라는 이름의 이 물고기가 인간의 사고에 개입하여 본격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전까지는 대부분 사람들은 이 물고기의 존재를 몰랐으며, 알았다고 해도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나 귀족의 몸에만 사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서구인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물고기를 몸에 가지고 태어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스피노자라는 17세기 네덜란드의 가난한 렌즈 세공업자도 이 물고기에 대해 떠들어댈 정도였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

'모든 인간은 자유라는 물고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은 평등하다.' 이런 인식은 사회와 분리된 주체적 '개인'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근대 사회를 건설하는 동력이 됐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각자의 입맛에 맞게 개량했고 그 결과 '자유'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같은 종이라고 여길 수 없는 개체들이 출현했다. 그중 가장 강력하여 지구의 풍경을 바꾸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를 있게 한 새로운 종이 있다.

그 종의 이름은 '신자유'. 이 새로운 물고기는 인간의 머릿속에 '평등한 개인' 대신 외부의 간섭이 전혀 없는 '평등한 시장' 안에서 '무제한으로 경쟁하는 개인의 자유'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고 팔아도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졌다. 결국 이들은 출산을 거부하는 등 스스로 절멸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신자유라는 물고기는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불완전한 인간 대신 끊임없이 쉬지 않고 경쟁하는 유기체 휴머노이드를 자신들의 거주처로 삼기로 한 것이다.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신자유라는 물고기는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린다. 남아 있는 인간들을 완전히 멸종시키고, 휴머노이드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완전한 시장을 쟁취하기로 한 것이다. 결단은 가차 없이 실행되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다. 내 몸속에 살던 자유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한 마리도 빠짐없이 휴머노이드에게 바치고 노예가 되기로 한 것이다. 나의 이름은 머스크. 나는 노예다.

자유를 잃고 휴머노이드의 노예가 된 머스크는 피라냐 같은 신자유라는 물고기 대신 진짜 자유라는 물고기를 찾아 해방되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난다. 상상은 자유니까, 이런 내용이 20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진 후 OTT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로 배급되는 걸 꿈꿔본다. 드라마의 시작은 아마 2005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이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자유', '자유로운', '해방' 등 자유와 관련된 표현을 20분 동안 49번 사용한다.

이쯤에서 등장해야 할 인물이 있다. 노예 머스크는 자기 옆에서 웬 털보 아저씨가 투덜거리며 취임사를 시청하는 것을 발견한다. 털보는 계속해서 저들에게 자유라는 단어를 빼앗겼다고 중얼거리고 있다. 털보의 이름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레이코프는 일반적 의미의 자유와 극우적 의미의 자유를 섞어서 쓰는 이 연설에 열 받아서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썼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사에 자유와 관련된 표현이 49번이나 등장하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빌어 ‘자유’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레이코프 페이스북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사에 자유와 관련된 표현이 49번이나 등장하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빌어 ‘자유’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레이코프 페이스북

레이코프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 방식은 '은유'에 의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조직된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 마라톤을 하고 있지 않지만, 수업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될 때 우리는 수업을 못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실제 증권 문서가 마룻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주식이 바닥을 쳤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와 관련해서 레이코프는 우리가 '국가는 가정'이라는 은유를 따른다고 설명한다. '모국', '국부', '건국의 아버지'나 '대한의 아들딸'과 같은 표현에는 이런 은유가 작동하고 있다.

'국가는 가정'이라는 은유에 바탕한 모형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중 보수주의자들이 따르는 모형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의 모형이다. 이 모형에서는 권위, 순종, 통제, 위계, 절제, 개인의 책임이 강조된다. 이와 반대로는 진보가 따르는 '자애로운 부모' 모형이 있다. 이 모형에서 자애로움은 부모와 자식 상호 간의 존중에 바탕한다. 이 모형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입',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이다.

이 두 모형의 관점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을 살펴보자. 엄격한 아버지 모형에서 누군가 가난은 그의 절제 부족의 결과물이며, 그의 부도덕을 나타내는 지표, 그리고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런 그를 사회가 돕는 것은 그가 남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결국 그를 빈곤에 빠뜨리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달리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에서는 빈곤을 겪는 이에게 감정이입하고, 그를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방안을 강구한다. 이 모형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난으로부터 자유는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이기 때문이다. 이 모형에서는 사회안전망과 같은 제도가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여긴다. 이 모형에서 자유란 개인이 알아서 '능력껏'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의 담론장에서는 자신들이 따르는 모형에 따라 다른 종류의 어휘들을 유통시킨다. 레이코프가 제시한 내용 중 일부만 소개하자면 보수의 담론에서는 규율, 의지, 권위, 경쟁, 소득, 간섭, 방해와 같은 어휘를, 진보의 담론장에서는 사회적 책임, 인간의 권리, 배려, 관심, 도움, 안전과 같은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

이처럼 다른 어휘가 사용되는 두 담론 공간에서 공유하는 어휘가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유'일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자유가 필수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든 진보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논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안전지대의 문제다. 그런데 이 '자유'의 안전지대는 보수가 진보의 어휘를 자신들의 것으로 빼돌리는 뒷문 역할을 한다. 이 안전지대에서 보수는 자유와 짝을 짓고 있던 평등을 떼어내고 자유에 경쟁과 시장, 그리고 한국에서는 멸공을 덧붙이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노동의 착취는 '유연한 노동 조건'으로, 사유화는 민영화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은 '자기 경영'으로 포장된다. 이런 언술에 자꾸 노출되면 사람들의 혈관 속에는 자유가 아닌 신자유라는 물고기가 번성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자유의 이름 아래에서 행해진다. '이 자유는 뭔가 이상한데?' 라는 반응에, 보수는 당당하게 되묻는다. "자유 싫어? 지금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과 압제를 긍정하는 거야?" 지난 5월 10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35번이나 자유를 거명한 것도 이런 전략처럼 보인다. 다른 의미의 자유가 왔다갔다 널을 뛰고, 연대와 박애라는 말로 양념을 하고 있지만 결국 대통령이 말하고 싶은 자유란 '시장의 자유'다. 그렇게 무심한 듯,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런 전략이 노리는 가장 큰 효과 중 하나는 진보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자유가 오염됐다고 생각하고, 이 말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시장의 자유'라는 말에서는 자본의 횡포에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멸공이란 말과 함께 호명되는 자유라는 말 속에는 차갑고 섬뜩한 살의까지 느껴진다. 자유라는 말은 오염되었다. 그러나 오염되었다고 이 말을 버릴 수는 없다. 자유라는 말은 우리의 신체적 경험과 너무나 강력히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이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는 몸의 기억을 통과해야 한다. 즉 추상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 번째 가로대를 밟아야 하는데, 이 가로대는 '몸의 이동'이라는 우리의 신체적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얽매여 있다', '족쇄를 차고 있다'와 같은 표현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의 이해는 몸을 이동할 자유, 몸의 이동을 막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다리의 높은 가로대가 오염됐다고 해서 이 사다리 자체를 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는 것. 누군가 자유를 말하면 무엇으로부터 자유인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집요하게 묻는 것. 그리하여 억압이 자유로 포장되는 이 상황을 전복하는 것. 차별받지 않은 자유,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죽지 않을 자유, 쪼개기 계약으로 고용불안에 떨지 않을 자유 등 억압의 구체적인 이름들을 자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방의 이념으로서 자유라는 이름을 되찾는 유일한 길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들의 혈관 속에 자유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다시 헤엄치는 것을 느끼고 싶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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