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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스타 다녀간 카페서 인증샷 찍고… 일본식 '성지 순례'

입력
2022.06.11 04: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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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성지 순례’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온라인상의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미디어를 통해 묘사된 물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하고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팬덤인 ‘미디어 순례'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일본 한류 드라마 팬들의 한국 방문 등 ‘성지 순례’도 이런 추세의 한 형태다. 일러스트 김일영

온라인상의 정보가 풍부해지면서 미디어를 통해 묘사된 물리적 장소를 직접 방문하고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팬덤인 ‘미디어 순례'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일본 한류 드라마 팬들의 한국 방문 등 ‘성지 순례’도 이런 추세의 한 형태다. 일러스트 김일영

◇남이섬을 유명한 관광지로 만든 드라마 <겨울연가>의 팬덤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살 때의 일이다. 일본을 여행할 때 오사카 거리를 안내해 준 일본인 친구로부터 한국 여행을 계획 중이라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이전의 신세도 갚을 겸 친구가 원하는 곳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어디에 가고 싶냐는 질문에 난데없이 “남이섬”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경복궁, 인사동, 남산 타워 등 서울에도 그럴 듯한 관광 명소가 많은데, 굳이 강원도의 작은 유원지가 궁금하다니 의아할 수밖에. 이유를 물으니, 드라마 <겨울연가>가 바로 남이섬에서 촬영되었단다. 드라마를 인상 깊게 본 뒤 촬영지에 대해서도 흥미가 돋았다는 이야기였다. 납득은 갔지만 친구의 취향이 별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남이섬에 가 보니 웬걸 일본인 방문객이 바글바글했다. 그 드라마가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촬영지를 보겠다고 해외 여행까지 나서는 팬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미 꽤 많은 일본인 관광객이 그곳을 찾았던 듯, ‘겨울연가 커플의 데이트 장소’, ‘겨울연가에 등장하는 세쿼이아 가로수 길’ 등이라고 쓰인 일본어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잠깐이나마 친구가 별나다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다만,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내게 남이섬은 그저 심심하고 평범한 유원지였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남녀 주인공의 낭만적 데이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친구에게는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여행지였지만 말이다.

그때만 해도 드라마를 촬영한 장소를 직접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일본인 팬들이 반가우면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를 둘러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한편으로는 한국 대중 문화 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디어에 등장하는 실제 장소를 찾아가 보는 스타일의 여행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성지 순례’가 대중 문화 콘텐츠의 팬덤을 상징하는 말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과 인연이 있는 특정 장소를 방문하는 팬들의 행위를 일본에서는 ‘성지 순례’라고 부른다. 원래 성지 순례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의미가 부여된 곳을 찾아가 참배하는 신앙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말이 대중 문화와 관련한 팬덤의 행태로 언급되는 경우를 훨씬 많이 보았다. 기성 종교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나, 그만큼 대중 문화 콘텐츠와 관련이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팬들의 행위가 활발하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팬들이 남이섬에 가기 위해 한국 여행을 계획했던 것처럼, 영화 <해리포터>의 팬들은 호그와트 마법 학교의 촬영지를 보기 위해 영국의 글로스터 대성당을 방문하는 일정을 짠다. 코로나19 사태로 해외로 가는 순례길은 막혔지만, 일본 국내의 ‘성지’를 도는 발길은 뜸해질 기색이 없다. 실제로 수많은 ‘애니메이션 성지’, ‘게임 성지’가 현존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시골 기차역이 애니메이션의 배경으로 묘사된 뒤 인기 관광지로 변모했다든가, 가상 어드벤처 게임의 무대가 되었던 낡은 신사에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애니메이션 여행 협회’라는 단체가 정식으로 결성되고, 매년 애니메이션 팬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성지’를 선정해서 발표할 정도이니, 이미 여행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보니 아예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기획, 제작 단계에서부터 팬들의 ‘성지 순례’를 염두에 두기도 한다. 관광객 유치를 원하는 특정 지역과 협조를 얻어, 그곳을 무대로 삼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지역으로서는 자연스럽게 관광객으로 유치할 수 있고, 제작자에게는 제작비나 홍보 활동을 지원하는 구원 투수가 늘어나니 나무랄 데 없는 ‘윈윈’이다. 일본처럼 ‘성지 순례’라는 호칭을 붙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가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사후 관광객 유치를 염두에 두고 제작 단계에서부터 공을 들이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하니, 일본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한편, ‘성지 순례’라는 단어는 거창하지만 실상은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에 잠깐 등장한 장소에 직접 가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팬들은 바로 그곳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텐션이 올라간다. 그렇게 현지를 즐긴 뒤 ‘인증샷’을 찍는 것까지 마무리해야 순례자의 의무가 끝난다. 예를 들어, 도쿄의 코리아 타운으로 불리는 신오쿠보에는 한류 스타가 실제로 방문한 적이 있는 기념품 숍이나 카페 등이 성업 중이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젊은 팬들은 이런 가게를 방문해, 스타가 앉았다는 바로 그 좌석에서 ‘인증샷’ 사진을 찍고 소셜 미디어에 업데이트한다. 글로벌 팬데믹 때문에 한국에 직접 갈 길이 없으니, 한류 기념품 숍이나 카페 등 가상의 성지에서 아쉬움을 달래는 방법이다. 일본에서도 최근 해외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한국 여행을 위해 비자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 중에는 드디어 한류의 진짜 ‘성지’에 발을 내딛겠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순례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미디어 순례’, 종교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미디어 행동

연구자들은 미디어 속에서 묘사되는 물리적 장소를 직접 방문,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팬덤을 ‘미디어 순례(media pilgrimage)’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한다. 일본의 ‘성지 순례’도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디어 순례’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인데, 그 배경에는 콘텐츠와 관련한 상세한 정보나 배경 지식, 뒷이야기 등을 쉽게 열람할 수 있게 한 인터넷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다양한 장르의 ‘미디어 순례’의 공통된 특징은 콘텐츠에 대한 배경 지식을 잘 알면 알수록 장소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미디어 위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위가, 실제 장소에 대한 체험을 오히려 압도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도쿄에서 멀지 않은 사이타마(埼玉)현에 사는 일본인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사이타마는 자연 환경은 풍요롭지만 특별한 볼거리는 적어서 ‘방문하고 싶은 국내 관광지 랭킹’에서 꼴찌를 다투는 곳이다. 친구 집에 놀러가는 것 이상의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친구와 담소를 나누다가 자기 동네가 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의 실제 무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작은 시골 마을이 갑자기 대단히 흥미진진한 탐험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오, 꼬마 주인공이 울음을 터뜨린 곳이 바로 이 나무 앞이었구나!”, “아, ‘고양이버스’의 행선지가 바로 여기였구나!”라며 흥분해서 마을 뒷동산에 올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갑자기 밋밋했던 동네 풍경이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기분이 ‘미디어 순례’를 뒷받침하는 심리일 것이다. 사실 순례는 다소 맹목적 믿음과 강한 신념으로 구동되는 종교적 행동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현대 사회의 미디어 소비 행동을 설명하는 프레임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에 대적할 기세로 나날이 커지는 미디어의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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