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의 입장 헤아린 후 협상 테이블에
"파이 키우는데 적극 협력 후 나눠달라고 해야죠"
아내와 두 아들의 인정과 존경이 가장 큰 언덕
"협상의 기술은 모두 골목에서 배웠습니다."
노조원들에게 일곱 번이나 리더로 인정받은 김동준(56) 평화발레오 노동조합 위원장의 고백이다. 김 위원장은 "각지에서 올라온 가족들이 뒤섞여 도시에 정착하던 그 시절은 냉랭한 도시적 삶과 시골의 정이 공존하던 시대였다"면서 "아웅다웅 다투기도 했지만 낯선 이들과 마음을 나누며 살았던 골목 풍경이 경제구성원들이 화합해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과 무척 닮아있었단 생각이 종종 든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1960년대 중반은 고향을 떠나 도회로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응답하라 1988' 속에 묘사된 서울처럼 지방 대도시의 골목에는 타향살이가 그득했다. 지금은 차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지역도 버스를 타고 세 시간씩 덜컹거리며 가야 했던 그 시절, 반세기 전의 거리 감각은 대구에서 봉화는 지금의 베트남 다낭이나 라오스보다 더 먼 곳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은 물론이고 집집이 바위 하나에도 이름을 붙이고 냇가에 돌이 놓인 위치까지 기억하며 살던 이들에게 도시는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 골목은 따뜻했다. 같은 동네에 모여 사는 만큼 형편도 비슷했고, 너나 할 것 없이 고향을 떠나온 처지는 서로를 이해하고 정을 나누며 사는 데 있어 중요한 공통분모로 작용했다. 살던 곳도, 관습도, 성격도 다른 이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살면서 나누고 배려하고, 때로는 싸우고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
김 위원장은 "아이들은 비교적 편견이 없었지만, 시골에서 성장하다가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체득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어른들과 다를 바 없었다"면서 "이후의 삶에 닥칠 다양한 갈등을 풀어가는데 좋은 수업이 되었다. 사회적 덕성은 모두 골목에서 익혔다"고 고백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고생하신 어머니
김 위원장의 고향은 경북 김천, 그가 갓 돌이 지났을 무렵 대구 평리동으로 이사를 왔다. 김 위원장은 친구 세 명과 똘똘 뭉쳐 다녔다. 사총사로 불렸다. 지금까지 5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성격도 직업도 제각각이다. 김 위원장이 친구들 중에서 가장 차분한 편에 속했고, 피가 끓는 친구도, 또 무슨 일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친구도 있다.
"한 친구는 불같고, 한 친구는 얼음 같고, 나머지 한 친구는 흘러가는 대로 따르는 편이었죠. 성격이 제각각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그리고 신뢰를 쌓아가는 법을 익혔던 거죠. 노사협상의 기본 기술은 그때 다 배웠죠."
질풍노도의 시기도 친구들이 있어 무사히 겪어냈다. 김 위원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별세했다. 40대 초반에 혼자가 되신 어머니는 막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집안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형이 셋이나 있었지만,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받으면 그걸 안 먹고 집에 가져와 동생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위의 형과도 4살이나 차이가 났다. 형들은 자신들의 삶을 견디기에도 버거웠고, 김 위원장은 사춘기와 청년기를 형제 같은 친구들과 지냈다. 함께 가출해서 포항에서 횟집 호객꾼으로 지낸 적도 있었지만, 소년티를 벗고 사회에 적응해나가던 시절에는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노조 들어서면 회사 망한다"고 하던 시절
1986년 평화클러치(현 평화발레오)에 입사했다. 그 시절 노조 현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기업인들은 "노조 들어서면 회사 망한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고, 노동자들은 여러 불합리한 처우와 제도에 맞서 저돌적으로 부딪쳤다. 김 위원장은 "돌이켜 보면 회사도 노조도 모두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면서 "경험도 없고, 넘어야 할 산도 한두 개가 아니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에 따르면 당시 노조위원장들은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노사 갈등은 물론, 노조끼리의 갈등도 심각했다. 김 위원장의 전임 노조위원장이 겨우 2선에 성공했다.
"활동 초기에는 저도 과격했습니다. 행동대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죠."
1989년 교섭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노사 갈등과 불신이 극심했으나 다행히 현대자동차가 꾸준히 성장하면서 협력사들도 덕을 봤다. 노사 협상 테이블에 올려진 성장의 과실은 늘 풍성했다. 임금이 20~30%씩 상승하기도 했다.
무턱대고 회사에 달라고만 했던 건 아니었다. 노조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때로 노조원들에게 경영진을 대변하기도 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갔다.
교섭의 철학 '역지사지'
가슴 아픈 성숙의 시간도 있었다. 1997년에 터진 IMF 외환위기 때였다. 구조조정으로 동료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로 노조의 최우선 과제는 고용안정과 지속 가능한 회사다. 경영진이 아니라 노조가 나서서 먼저 변화와 발전을 강조하는 이유다.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나름의 교섭법을 체득하고 정립했다. 이른바 '평화발레오 노조식 교섭철학'이다. 첫 번째 원칙은 역지사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일단 사측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본다. 김 위원장은 "역지사지는 마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동시에 브레인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사회, 경제환경, 산업의 변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관련된 정보를 가능한 한 풍부하게 모아야 진짜 역지사지가 가능합니다."
'생산자로서의 나(노조)'를 보여주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파이를 키워야 나눠 먹을 게 있습니다. 노조가 파이를 키우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기여했는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제품이 세계 시장의 노동자들과 경쟁해서 이겨낼 때 우리의 몸값이 유지되는 것이거든요. 자본이 우리를 믿고 꾸준히 투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 노동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생산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분배에서는 힘겨루기를 하자는 것이죠."
김 위원장은 "데이터를 바탕에 둔 역지사지, 내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그런 다음 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순서를 지키면 우리 사회의 거의 대부분의 갈등도 가라앉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이전투구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서 또 미래를 위해 협의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인정이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는 김상태 평화발레오 회장의 경영철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에 공감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차원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급식봉사, 김장담그기 등 다양한 봉사를 실천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유니셰프, 한국어린이재단에 10년 이상 장기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김 위원장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도 근로자의 날 유공 정부포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5월1일 열린 시상식에서 산업포장을 받았다.
사회적으로도 두루 인정받고 있는 데다 7선 당선이라는 나름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훈장'은 따로 있다. 바로 아내의 인정이다.
"노조 활동을 시작할 때 아내가 반대했어요. 노조 활동 할려면 이혼하자는 말까지 했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인정을 하는 분위기더군요. 가족의 신뢰와 지지가 가장 큰 언덕입니다."
균형 감각도 가족 안에서 찾는다. 두 아들이 농담처럼 툭, 던지는 말에서 정신이 번쩍 들 때가 많다.
"회사에서 노조위원장이지 집에서까지 노조위원장은 아니잖아요."
그가 가장 인간적인 노조위원장으로 남을 수 있는 비결이자, 사회 초년생들의 눈높이에서 회사를 바라보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평화발레오가 지역 사회 젊은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사업장이 되어야겠죠. 직원들이 열심히 해주고, 또 회사에서 그만큼 알아주고 보상해주면 그게 가장 최적의 회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젊은이들이 와서 일하고 싶은 회사로 남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20년 동안 위원장직을 맡겨준 노조원들과 협상 테이블에서 제 이야기를 귀 기울어진 경영진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