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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두둔하는 사회

입력
2022.05.2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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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4월 마지막 주, 코로나19에 감염됐다. 1주일간 휴가가 주어졌고 안방에서 격리에 들어갔다. 휴가 기간 일을 떠맡게 된 팀 후배와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넘어진 김에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넷플릭스에 가입했고 작년 여름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D.P.'를 뒤늦게 '정주행'했다. 이 드라마를 본 뒤 "나도 방관자였다"고 반성하는 군필자가 많았다는데... 고백하자면 난 피해자도 방관자도 아닌 가해자였다.

우리 부대는 일병 '말호봉'(상병 계급을 달기 직전, 일병 중 최고참)을 '교육군번'이라 불렀다. 이들이 군사훈련을 마치고 전입을 온 신병들을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2001년 8월, 일병 말호봉이 된 나는 신병 3명의 교육을 맡았다. 말이 교육이지 사실상 '군기잡기'였다. 막사 뒤 으슥한 곳에서 엎드려뻗쳐, 앉았다 일어났다와 같은 '얼차려'가 이뤄졌다. 부끄럽게도 당시에는 큰 잘못이란 인식을 못했다. 후임병을 때리거나 인격을 모독할 정도의 행위는 아니라는 생각, 군대에서 이 정도 얼차려는 줄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가 뒤섞인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게 교육을 받던 이등병 한 명이 소원수리함을 통해 신고하는 바람에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간부에게 불려간 나는 "영창(부대 안 감옥) 갈 준비하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저지른 일들이 '가혹행위'란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피해자에게 너무 미안하고 경직된 군 문화에 너무 쉽게 길들여진 스스로가 한심해서다. 그러나 당시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나를 향한 선임병들의 격려였다.

"내무반 질서를 잡으려다 희생양이 된 거니 어깨 펴" "너처럼 군 생활 하는 게 잘 하는 거야. 죄책감 갖지 마."

선임병들은 그 이등병(익명 고발이었지만 누가 고발자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즉시 분리하는 조치도 없던 시절이었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나를 감쌌다.

선임병들의 두둔은 위안이 되기는커녕 불편함과 죄책감만 안겨줬다. 같은 내무실을 쓰고 있는 그 이등병이 어떤 심정일지 생각하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빨리 영창 가서 죗값을 치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결국 영창까지 가지는 않았다. 군대 간부들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동분서주 애를 써준 덕(?)이었다. 그 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일병 말호봉은 여전히 신병들을 교육시켰지만 소원수리함에 신고가 접수되는 일은 없었다. 하나 다행스러운 건 그 이등병이 무탈하게 우리 부대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는 사실이다.

한없이 부끄러웠던 군대 시절 기억이 최근 내 머릿속에 다시 소환됐다. 진실을 밝히는 일을 '내부총질'로 폄하하고 성 비위자를 오히려 두둔하는 더불어민주당 일부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행태를 보면서다.

"우리 당의 제 식구 감싸기와 온정주의는 그들(국민의힘)보다 오히려 강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민주당이라면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지켜내야 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감춰서도 안 되고 선거를 이유로 조사와 징계를 미뤄서도 안 됩니다."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페이스북에 호소한 글이다. 너무도 당연한 상식과 원칙이 공격받는 사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삐뚤어진 집단주의, 온정주의는 여전한 듯싶다.

윤태석 정책사회부 차장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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