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범죄 경보 울렸지만… '혐오 범죄' 실태 파악할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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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 범죄 경보 울렸지만… '혐오 범죄' 실태 파악할 길 없다

입력
2022.05.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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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정치권 앞다퉈 '혐오 범죄 근절' 공언
여전히 범죄통계원표 범행 동기에 '혐오' 없어
관련 입법 시도 있었지만 열흘 만에 백지화
전문가 "정책 기획·입안 시 근거 통계 필수적"

2016년 5월 18일 오후 시민들이 묻지마 살인에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며 서울 강남역에 붙인 스티커들. 신상순 선임기자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6년이 지났지만 혐오 범죄 발생 실태를 파악할 제도는 여전히 마련되지 않았다. 각급 수사기관이 집계하는 범죄통계상 '혐오 범죄' 항목은 없어서다. 사회 갈등이 다양화·첨예화하면서 혐오 범죄 발생 가능성이 날로 커지는 상황인 만큼, 이에 대응할 정책 입안의 기초 근거가 될 통계 기반이 속히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사회, '혐오 범죄' 눈뜬 지 6년… 기초 통계도 없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프로파일러 이상경 경사가 2016년 5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 브리핑룸에서 강남역 노래방 살인사건 피의자 심리분석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2016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건물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처음 보는 30대 남성의 흉기에 수차례 찔려 살해당했다. 여성단체 등은 범인이 앞서 들어온 남성 7명은 공격하지 않았고,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 죽였다"고 진술한 점 등을 들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했다. 수사기관과 법원 등은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한국 사회는 이를 계기로 '특정 집단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동기로 발생하는' 혐오 범죄에 눈을 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여성 혐오 범죄는 발생 빈도, 피해자 규모·특성 등 기본적 현황을 파악할 통계조차 없다. 국내 형사사법기관 범죄통계의 기반이 되는 범죄통계원표가, 처음 만들어진 1960년대 형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다. 사건 피의자 관련 정보를 기록하는 '피의자 원표'에는 범행동기의 선택지로 △이욕 △사행심 △보복 △우발적 △현실불만 △기타 등이 있을 뿐 '혐오'는 없다. 사건 당시 정치권은 앞다퉈 혐오 범죄 대책을 쏟아냈지만 정작 통계 신설이라는 기본 조치는 건너뛴 셈이다.

혐오 범죄 통계를 집계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16년 12월 이종걸 전 민주당 의원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계기로 증오범죄(혐오범죄) 방지 제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며 수사기관이 '증오범죄'를 분류하고 통계원표를 작성하도록 하는 '증오범죄통계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동성애를 조장하는 법안"이라는 보수 개신교의 거센 반발로 법안은 열흘 만에 백지화됐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 후반 엽기적 인종 혐오 사건이 발생하자 1990년부터 혐오범죄통계법을 만들어 매년 통계를 공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논의가 확산돼 2009년에는 증오범죄예방법도 제정·시행됐다.

"정확한 통계 없인 정책 입안도 문제 해결도 없다"

시민들이 2016년 5월 21일 서울 강남역에서 여성혐오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피해자를 추모하고자 강남역에서 침묵 추모 행진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강남역 인근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 생면부지의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30대 남성 피의자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동기로 "여자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진술해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뉴스1

통계는 정책 입안 및 정교화의 근거가 된다. 김지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증거 기반 정책 수립'이 이뤄지는 추세로, 정책을 제안하려면 현상·실태를 보여주는 통계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혐오 범죄는 관련 형사법도, 원표상 통계 항목도 없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어 "수사 단계에서 '혐오'를 범행동기로 파악하기도 어렵고 한국 법체계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 주장도 있지만, 그럼에도 혐오 범죄가 피해자와 그 소속 집단에 미치는 효과가 너무나 위중해 관련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며 "강남역 사건을 혐오 범죄로 인식한 여성들은 여전히 불안감을 갖고 있으나 현상 파악이나 적절한 정책적 대응이 미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윤미영 서울여성회 사무처장은 "범죄통계를 정확히 갖는다는 것은 정책을 체계화하고 예산을 투입해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정확한 통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국가가 이 문제를 중요히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비판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올해 여성 대상 폭력 행위를 중심으로 범죄통계 개선 사업을 진행 중이지만 혐오 범죄를 통계에 신설하는 방안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범죄통계 고도화 사업에서 '친밀한 관계의 살인' 통계를 세분화하고, 스토킹·교제폭력 등 살해 이전 원인을 밝힐 수 있도록 하는 등 여성 폭력 통계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면서도 "혐오 범죄를 통계화하려면 근거법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무엇이 혐오 범죄인지'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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