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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지키는 '요리', 세상 바꾸는 '혁명'… 당신은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나요

입력
2022.05.14 10:00
수정
2022.05.16 18:4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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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왓챠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은 '요리하는 할머니' 다이애나 케네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IMDb 제공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은 '요리하는 할머니' 다이애나 케네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IMDb 제공

언제부터인가 주변에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문장은 '귀여운'을 대체하는 다양한 형용사로 변주될 수 있다. '섹시한 할머니'라든가 '건강한 할머니' 같은 식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할머니로 불릴 수 있는 나이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어떤 할머니든 괜찮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십대, 이십대 때는 마흔이 된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으니 노년의 나이를 상상하게 된다는 것, 가능하다면 소망하게 된다는 것만 해도 큰 발전으로 느껴졌다. 일단 유머를 삶의 중요한 가치로 두고 살고 있으니 '재미있는 할머니'가 될 수 있다면 멋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문장을 만날 때면 언제나 마음 한쪽이 덜그럭대기도 한다. 불편하면 질문하는 버릇이 튀어나온다. 2022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인빈곤율 1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귀엽거나 재미있는 할머니가 된다는 소망은 어떤 의미일까? 경제적 빈곤과 앞선 형용사가 공존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미래형의 소망을 말하려고 할 때, 현재의 나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이 세계를 더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면,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현재의 내가 소망하는 바를 알려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에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철학자인 '혁명하는 할머니'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인생을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에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철학자인 '혁명하는 할머니'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인생을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디 에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를 보고 한 번 더 이 문장을 떠올리게 됐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철학자였고 작가인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인생을 담은 인물 다큐멘터리다. 1915년에 태어나 2015년에 세상을 떠난 그레이스는 주거 개선을 위한 시위에 처음으로 참여한 이래로 80년 동안 혁명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일에 맞춰 한국어 자막을 제작해 이 작품을 상영하는 프로젝트팀에 참여했다. 서울을 포함한 전국 8개 도시에서 개최된 이 상영회의 제목은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였다. 기획팀의 일원으로서 이 제목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나는 혁명하는 '할머니'를 상상하고 있었다. 영화를 함께 보는 사람들이 더 먼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은 제목이었다. 영화를 함께, 다시 보고 더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혁명하고 있어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 움직이고 살아있는 언어로 나를 꾸미고 싶다면, 그 동사는 지금도 내 삶에서 현재형이어야 한다.


영국 출신인 다이애나 케네디는 멕시코 요리 연구가이자 환경운동가이다. IMDb 제공

영국 출신인 다이애나 케네디는 멕시코 요리 연구가이자 환경운동가이다. IMDb 제공

이 단순한 진리를 알려준 할머니가 한 명 더 있다. 그의 이름은 다이애나 케네디. 멕시코 음식을 만들고 연구하는 영국인이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에 이 할머니가 등장한다. 첫 장면부터 픽업트럭을 몰면서, 거친 운전으로 진로를 방해하는 남자 운전자에게 욕설을 내뱉는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당시 아흔다섯, 올해로 아흔아홉이 되었다. 다이애나 케네디를 수식하자면 '요리하는 할머니'가 딱 맞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멕시코를 향한 여행길에서 일생의 사랑을 둘이나 만났다. 하나는 남편, 또 다른 하나는 멕시코 음식이다. 다이애나가 운명이자 생에 유일한 사랑이라고 표현한 남편은 할아버지로 불릴 나이가 되기 전에 아내의 곁을 떠났지만, 멕시코 음식은 다이애나를 떠나지 않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뉴욕에서 지낼 때 지인의 권유로 멕시코 요리 강의를 시작하고 멕시코 요리책을 출간하면서, 다이애나는 영국인 멕시코 요리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요리와 식생활은 한 국가의 중요한 문화이기에 영국 여성이 전통 멕시코 요리의 전문가로 소개되는 일을 달갑지 않아 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있었을 법하다. 다이애나는 그 목소리에 이런 대답을 돌려준다. 전통 음식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멕시코 할머니, 그 할머니와 함께 요리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1960년대부터 멕시코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전통 요리를 찾고, 맛보고, 직접 다시 만들어 요리법을 정리한 사람에게 다른 반박이 필요할 리 없다. 다이애나가 오래 인연을 맺고 지낸 한 멕시코 전통 음식점의 요리사이자 사장은, 자신에게 다이애나는 멕시코인이라고 말한다. 출생지를 기준으로 국적이 정해지는 세계에서 다이애나는 영국인이지만, 무엇을 위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는 멕시코인이다. 멕시코와 영국 양쪽에서 훈장을 받을 만큼 멕시코 음식이 미국과 영국 중심의 서구에 알려지는 데 기여한 인물인 것이다.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은 다이애나 케네디가 멕시코 요리를 만들면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에 집중한다. IMDb 제공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은 다이애나 케네디가 멕시코 요리를 만들면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에 집중한다. IMDb 제공

하지만 그의 전설적인 요리책이 어떻게 세상에 멕시코 음식을 알렸는지보다, 멕시코 요리를 만들면서 다이애나 케네디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에 더 집중했다는 점이 이 다큐멘터리의 장점이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걷고 직접 요리를 하며, 세계 곳곳에 몇 개씩 레스토랑을 소유하고 있는 요리사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전통 요리법을 가르치는 이 노년의 여성은 자신이 만드는 요리와 닮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젊은 시절부터 고집이 세고 다른 사람에게 굽히는 것을 싫어했다는 다이애나는 자연친화적인 전통적인 요리법을 고수한다. 그의 완고하기까지 한 전통적 방식을 향한 고집이 환경운동과 이어지는 순간, 슴슴했던 다큐멘터리에 소금을 친 듯 맛이 살아난다. 과카몰리를 만들 때는 절구를 사용하고 가능한 한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요리하라는 그의 말은 옛 방식만이 옳다는 고집을 넘어 자연을 더는 오염시켜서는 안 된다는 시급한 현재의 세계가 당면한 문제로 연결된다. 나는 멕시코 요리를 만드는 영국인 할머니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지 몰랐다. "앞으로 태어날 세대가 있다는 것과 우리에게 (자연을 지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다이애나가 젊은 세대를 향한 조언을 건네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고 말하는 그에게 과거를 반추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과카몰리에 볶은 마늘을 넣는 것은 크게 혼낼 일이지만, 세상에 교훈이나 가르침을 줄 생각은 없다. 그는 요리를 더 하고 싶고, 요리를 더 알고 싶을 뿐이다. 멕시코 전통 요리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멕시코에서 나고 자란 신선한 재료가 필요하고, 이 재료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지켜져야만 인간은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다이애나 케네디에게는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숲과 시장을 걷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요리하는 것. 그러니 다이애나 케네디는 요리하는 할머니일 수 있는 것이다. 60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왔기 때문에.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 포스터

'다이애나 케네디: 과카몰리 철학' 포스터

앞서 언급한 그레이스 리 보그스, 1년 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의 프랜 리보위츠, 그리고 다이애나 케네디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오래 살아보니 괜찮더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은 어렵다"고 말한다. 레즈비언인 프랜 리보위츠, 아이를 갖지 않았던 그레이스와 다이애나 모두 세상이 요구하는 정상성이나 기준에 부합하게 살지 않았다. 끊임없이 관점을 수정할지언정, 자신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에 관한 확고한 주장만은 굽히지 않았다. 프랜 리보위츠에게는 예술, 그레이스 리 보그스에게는 사회와 혁명, 다이애나 케네디에게는 요리와 환경이 그 가치였다. 나는 이 고집 세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할머니들이 좋고, 이들을 보는 게 즐겁다. 다이애나는 세상이 자신에 관해 떠드는 말들에 이렇게 대답한다. "이 나이 먹고도 자기 주장이 없으면 그게 제대로 된 인생이겠어요?"

나는 이 할머니들을 기꺼이 본받아서, 내가 되고 싶은 그 사람이 지금 되려고 한다.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면 지금도 내 삶에서 혁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 매일 춤추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면 지금 매일 춤을 추어야 한다. 나는 돌아보니 인생이란 이러하더라고 말하는 할머니는 되고 싶지 않다. 배움과 발견이 끝날 리 없으므로 모르는 게 많은 세상을 더 알고 싶어하고 궁금해하며, 하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세상이 계속 남아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려면 오늘, 지금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결정했다. 나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생존의 문제를 덜 고민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혁명을 하는, 재미있고, 재미있어하는 작가 할머니가 되겠다. 세 할머니를 섞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더 많은 여성이 현재에서 이어질 미래의 가능성과 다양한 모양을 확인하고, 참고하고, 본받고, 기대할 수 있도록, 더 많은 할머니를 보고 싶다.

윤이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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