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개표에서 로브레도 2배 이상 앞서
2위 로브레도 "민주화 운동 이어갈 것"
최종 개표ㆍ검표 과정 일주일 이상 걸려
필리핀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독재’로 악명 높은 마르코스 가문이 36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부친 집권 시절을 미화하는 등 철저한 이미지 메이킹과 다른 정치가문과의 동맹, 여기에 현지 민주세력의 부진까지 겹친 결과다.
10일(현지시간)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인 코멜렉(COMELEC)의 비공식 대선 개표 집계 결과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개표율이 95%를 넘은 상황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후보는 총 3,062만여 표를 얻었다. 2위 레니 로브레도 후보의 1,461만여 표보다 두 배 이상 앞선 수치다. 필리핀 복싱영웅 매니 파퀴아오 후보는 354만여 표에 그쳤다. 마르코스의 러닝메이트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후보도 압승이 유력하다. 사라 후보의 득표수는 3,100만여 표로, 로브레도의 파트너 팡길리난 키코 부통령 후보(910만여 표)보다 3배 이상 많다.
7,10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필리핀은 대선 개표 및 검표 과정이 상당히 길다. 코멜렉은 전날 "일주일 뒤면 새 대통령을 공식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현지 정가에선 이달 말은 돼야 최종 결과가 확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은 섬마다 진행된 개표 상황을 상ㆍ하원 의회가 모두 최종 검표를 해야 발표가 가능하다. 그러나 선거 당일 투표기 고장 등 개표 과정에 논란이 불거진 상황이라 검표 과정은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복잡한 개표 절차 때문에 필리핀은 전통적으로 득표 2위 후보가 패배를 승복하면 사실상 대선이 종료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2위 로브레도 후보는 이날 새벽 1시 지지자들에게 “개표가 끝나지 않았지만 민주화를 향한 필리핀 국민의 목소리는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며 “필리핀은 이번 대선을 통해 촉발된 핑크(민주화) 운동을 멈춰선 안 된다”고만 밝혔다. 판세를 뒤집기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선거 패배를 명확히 인정한 건 아닌 셈이다.
이에 반해 마르코스 후보는 전날 밤 11시 자신의 선거캠프에서 "국가 통합을 외친 나를 지지해 준 유권자와 자원봉사자, 동료 정치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필리핀 외교가 관계자는 "코멜렉이 전날 새벽과 오늘 아침 실제 개표 상황을 각 후보 캠프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했을 것"이라며 "로브레도 후보가 과거와 같은 패배 수락을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선거는 마르코스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코스 후보의 대선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필리핀은 다시 독재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됐다. 1986년 부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피플 파워'에 쫒겨난 지 36년 만에 대권을 장악하게 됐다. 현지에선 마르코스 후보의 승리 요인으로 장시간 준비한 '정치 전략ㆍ전술'을 꼽고 있다. 전체 유권자 6,200만 명의 52%에 달하는 50대 이하 유권자들이 대부분 과거 반독재 저항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점을 적극 활용, 지난 6년 동안 마르코스 측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독재시절 미화 △다정하고 친숙한 이미지 구축에 집중해왔다.
지방 표 확보를 위해 정치 기득권과 동맹을 맺은 것도 주효했다. 실제 마르코스 후보는 전직 대통령을 배출한 에스트라다ㆍ마카파갈ㆍ아로요 가문을 포함, 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가문과 손을 잡았다. 몰락한 '피플 파워’ 세대는 지리멸렬했다. 준비 없이 뒤늦게 로브레도 후보가 대선판에 뛰어들었을 뿐, 이스코 모레노 마닐라 시장 등 야권 인사들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잡음만 일으키며 반(反)독재 표심을 분열시켰다. 클레오 칼림바힌 마닐라 살레대 정치학 교수는 "필리핀이 다시 어두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며 "로브레도로 대표되는 민주 세력들은 앞으로도 차기 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해야 할 것"이라고 현지매체 필리핀 스타에 지적했다. 마르코스 후보는 선관위의 공식 발표를 확인한 뒤 내달 30일 17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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