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특파원 필리핀 대선 현장 취재]
정당 정치 없는 인물 선거 '올인' 투표 구조
준비 없던 야권의 6년… 상징성·대표성 전무
"봉봉과 레니의 소속 정당이 왜 중요한가? 우린 지도자를 뽑는 것이지 당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9일 오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제1투표소 아우로라 케손 초등학교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기자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최근 지지율상 압도적 1위인 페르디난드 '봉봉'(애칭) 마르코스 주니어(56%) 후보와 2위인 레니 로브레도(23%) 후보의 정당 이름을 아예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고, 간혹 돌아온 대답도 정답이 아니었다. 마르코스는 연방당, 로브레도는 무소속이며, 3위인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7%) 후보는 진보운동당 소속이다.
유권자들이 정당 이름을 모르는 건 필리핀의 정당 정치가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후보의 러닝메이트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후보는 지난해 11월 무소속에서 라카스당으로 이동했으며, 파키아오 후보는 필리핀 민주당을 떠나 새로운 군소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했다. 정당 아래 정치인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유력 인사들의 이동에 따라 당이 수시로 바뀌고 없어진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필리핀 대선은 인물 중심의 선거로 흐를 수밖에 없다. 진보와 보수, 중도라는 단어는 선거운동 기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어떤 후보가 지도자로 적합한가"라는 인물평과 이미지가 표심을 지배한다. 여기에 지방의 표를 쥐락펴락하는 유력 정치가문들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 변수로 작용한다. 전국적으로 잘 관리된 이미지와 인지도에다 기존 정치권 기득권과 '동맹'을 잘 맺으면 정권 창출이 가능한 구조다.
마르코스 후보의 독주와 야권의 부진도 결국 '정당 없는 인물선거'로 설명이 가능하다. 2016년 로브레도 후보와 접전 끝에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마르코스는 이후 6년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공략하며 새롭게 '긍정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올인했다. 아들과 컴퓨터게임을 하는 친근한 모습 등을 SNS에 올려 큰 호응을 얻었고, 지금도 대다수 젊은 유권자들은 마르코스를 '독재자의 아들'이 아닌 '다정한 아빠'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다.
반면 로브레도 후보는 부통령 당선 이후 '이미지 메이킹'에 무심했다. 선거를 1년여 앞둔 지난해 중순부터 뒤늦게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SNS 등 여론 광장은 이미 마르코스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범야권 진영 또한 안이했다. 지난 6년 동안 정권에 대항할 상징적 인물을 새롭게 띄우지 못했고, 선거운동 기간에는 단일화 방식을 놓고 분열만 거듭했다. 전략적 SNS 관리, 유용한 합종연횡으로 진용을 짠 마르코스 후보 측과 달리 야권은 유권자의 눈에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지난 7일 마닐라 도심에서 만난 세르히오(54)씨는 "로브레도는 매일 싸우기만 해 지지를 접었다"며 "(나머지 후보들도) 마르코스처럼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마르코스 후보 캠프가 유권자의 감성을 건드리며 지지세를 넓혀 온 실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야권으로선 유력 정치가문과의 효과적 동맹 부재가 뼈아프다. 마르코스 후보는 필리핀 정치를 지배하는 에스트라다·마카파갈·아로요 가문과 손잡은 뒤 남부의 신흥강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 가문과는 러닝메이트 관계를 설정했다.
반면 야권은 어떤 동맹도 짜내지 못했다. 그나마 과거에는 독재에 항거한 '민주계열' 아키노 가문이 배경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그 명맥마저 끊긴 상황이다. 11대 코라손 아키노와 15대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전 대통령을 배출한 아키노 가문은 2008년과 2021년 두 인물이 사망한 뒤 정치 일선에서 존재감이 사라졌다. 가문의 정치 후계자를 키워내지 못한 것이다.
혹독한 독재로 유명했던 마르코스 '왕조'는 화려한 부활을 앞둔 반면, 마르코스 가문을 몰아낸 필리핀 '피플 파워'의 현재는 사라지고 있음은 명백하다. 실제로 마닐라의 한 외교 소식통은 "한때 민주혁명의 교과서였던 필리핀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틀을 잡지 못한 채 퇴보한 이유는 필리핀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필리핀 대선은 이날 오전 6시 시작해 오후 7시에 종료됐다. 최종 결과는 전자개표와 상·하원의 검표를 모두 거친 뒤 발표된다. 통상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걸린다. 필리핀 외교가 관계자는 "이곳 대선은 경쟁 후보가 패배를 인정하면 사실상 끝난다"며 "1위와 2위 득표율이 20~30% 격차로 벌어지는 시점이 17대 필리핀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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