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현중 등 글로벌 위기 점검 회의 잇따라
코로나19·미중 갈등·우크라 사태·중국 봉쇄 등
연이은 글로벌 공급망 교란 사태로 경영 위기
"개별 기업 자구책 마련 난망... 정부 역할 필요"
"매일매일이 전쟁입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주로 마련됐던 '플랜B'조차 이젠 항상 준비해야 할 '수시 전략'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긴장의 연속이라고 했다. 거듭된 악재에 따른 파장을 현장의 눈높이에서 전한 한 대기업 임원의 귀띔은 이미 위기감으로 가득 찼다. 연초 설계했던 경영전략 수정도 불가피한 상태다. 최근 한화와 현대중공업그룹 등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고 악화된 경영 환경과 관련, 대안 마련에 들어간 배경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여전한 데다, 격화된 미·중 갈등 와중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 봉쇄 등까지 겹치면서 파생된 비상경영의 일환이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절대적인 국내 기업들에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파생된 글로벌 공급망 교란은 거시적 시각에서 벗어나 미시적 시나리오 경영도 요구하고 있다.
기업들 “공급망 교란 장기화, 돌파구가 없다”
8일 재계에 따르면 수출 중심의 국내 기업들은 공급망 교란 등에 원유·원자재 가격 상승, 공급망 및 물류 대란 등을 주제로 잇따라 사장단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이 “앞으로 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위기와 차원이 다를 수 있다”면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감안해 검토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등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며 '플랜B' 이상의 대응을 주문했다.
고위급 회의를 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도 국제 정세 및 경영 환경 악화 상태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 정유업계 등 일부 업종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대체로 급등한 원유·원자재 가격 등으로 인해 오른 생산단가가 판매가격에 반영되지 않으면서 마진도 줄고 있는 상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아 해외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긴장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며 “관련 회의도 잦아지고 경영진의 지시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원자재 가격이 올라가면서 판매 가격으로 전가할 수 있는 식료품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플라스틱이나 고무 등 가격 전가가 쉽지 않은 업종이 가장 어려운 분야다”고 전했다.
눈덩이처럼 커진 국내 주요 기업들의 위기의식은 글로벌 공급망을 교란하는 외부 요인 4연타에서 비롯됐다는 게 중론이다. 2년 전 창궐한 코로나19 확산은 세계 각국의 국경 폐쇄 조치 등으로 이어졌고 전 세계 경기도 하락했다.
이 가운데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가 정치적 안보 개념을 경제와 결합하면서 심화한 미·중 갈등은 시장 논리도 깨버렸다. 이익을 위해 이념과 체제를 불문하고 경제 원리에 따라 구성됐던 공급망이 정치 논리에 의해 분열되면서 이른바 ‘경제 안보’가 부각됐다. 코로나19와 미·중 갈등의 여파로 불거진 공급망 교란 사태가 개별 기업들의 생존에 위협 요소가 된 셈이다.
게다가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제로 코로나’ 정책 추진과 함께 상하이 등을 봉쇄하면서 공급망 교란 상황은 극심화하고 장기화 기미까지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진정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중국 봉쇄 조치도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원자재 및 원유 등의 국제 가격은 고공 행진을 멈추지 않게 됐다.
“산관 협력해 근본적 대응책 마련해야”
더 큰 문제는 현재 불어닥친 공급망 위기 등을 각 개별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풀어내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지금 대외 환경은 개별 기업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다”며 “원자재 계약을 장기로 돌리고, 가격 변동폭을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재수 전국경제인연합회 아태협력팀장은 “공급망 교란이 단기적 양상일 때는 생산기지를 주변 국가로 옮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서도 “문제는 공급망 교란에 따른 비용이 증가하는 상황이 장기화하면 근본적 대응책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고 다양한 나라로 진출해 공급선을 다변화하고, 기업들의 국내 회귀까지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규제, 노동계와의 지속적 갈등 등 국내 경영 환경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 재계 반응이다.
학계에선 기업들이 각자도생에 나서게 된 건 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반도체 업계와 손잡고 삼성전자의 미국 내 투자 등을 이끌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정부 차원의 안전 장치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 기업 관계자는 “정부와 협력해 돌파해 가라는 조언을 듣곤 하지만, 실제 정부 측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답답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면서 “신뢰를 잃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전시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진 상황에서 대선 국면 동안 정부 대처에 공백이 생겼다”면서 “주요 산업·기술별로 정부가 구체적인 개별 기업들의 상황을 파악해 정부 차원에서 풀어줄 수 있는 실질적 산관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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